2부. 꼭 이렇게 살아야 해?
얼마 만에 썼던 일기였을까? 그때 썼던 3일간의 일기가 남아있다. 평소에 기록해 두는 것을 귀찮아하던 터라 당연히 일기는 쓰지 않는 사람인데 그 당시의 충격은 너무나 강렬하기에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여러 문장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주위를 떠다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나의 세상은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내가 선택한 그 한 사람에게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제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것들이다.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로고필(logophile)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그런 결말이었다. 부동산 투자로 애써왔던 나의 3년이란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렇게 무너지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인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본다. 아내에게도 그 3년이라는 시간동안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는 말에 나는 철저하게 무너져버렸다. 멘탈이 단단한 투자자가 되고 싶었던 것인데 어째 포기하는 마음이 단단해져 버렸다. 이게 아닌데.
그렇게 하나씩 내려놓기로 했다. 내가 하던 일과 내가 가졌던 짐이 모두 빠진 그 공간 속에는 오로지 나와 흰 배경만 남아 있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나 나올 법한 ‘시간과 공간의 방’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흰 공간 속에 홀로 서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
나를 누르는 압박들을 하나씩 떨쳐냈을 때 두려움보다는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 남의 시선을, 눈치에 휘둘리며 살아온 나에게는 어쩌면 처음으로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상태의 나를 만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하고도 구질구질한 나의 인생으로부터 드디어 해방이구나. 딱히 이룬 것은 없지만 그래도 끝이라니 홀가분해진다. 시험은 망쳐버렸지만 1등으로 제출하고 먼저 나서는 것에 만족하는 철없는 대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보았다. 모든 정리가 끝나면 혼자 세계를 떠돌다가 보내지도 못할 편지와 일기를 쓰면서 조용히 사라져서 서서히 잊히길 원했다. 기왕이면 피해를 주지 않고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그 와중에 실종이면 보험금을 못 남길 텐데 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고 보니 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대충 A4 한 장을 꺼내서 마구잡이로 끄적거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기록을 남긴다는 생각을 할 줄이야. 이렇게 기록을 하게 되는 선택지도 나에게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니 내가 모르는 선택지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지금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내 뇌로는 떠올릴 수 없지만.
아내의 마지막 말이 내게 닿는 순간, 나는 다시 차갑고도 선명한 현실로 불려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대답을 하기까지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 하나의 무언가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니까. 마침 내가 읽고 있었던 책은 <우선순위의 법칙>이었다. 맞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고 배웠었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린다.
자, 그럼 뭐부터 내려놓을까? 가족, 투자, 직장, ….
가족? 이게 흔들리니까 내 삶 자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비싼 값을 주고 배웠다.
투자? 내가 이걸 버리면 미래가 보이지 않던 그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평생 노동자로 살면서 그냥 그렇게 늙어서 죽는 삶을 생각해 보니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게 정말 살아 있는 게 맞는 걸까?
직장? 내가 꼭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고, 어찌어찌 흘러가는 대로 온 길이니까. 딱히 애착도 미련도 남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그만 놓아주자.
직장을 그만두면 자연스레 투자도 할 수 없어진다. 현금이 안 들어오는데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장을 내려놓고 투자는 버리지는 않았다. 그게 있어야 내 미래가 있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