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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Nov 17. 2021

금방 싫증 내고 끈기 없는 인간

그게 무엇이든 나를 규정지을 수 없다


 “애가 뭐하나 진득하니 하는 거 없이 금방 싫증 내고 끈기가 없어.”


어릴 적(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생각된다) 우리 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마실을 오면 좁은 식탁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난 그 이야기들을 듣는 걸 퍽 좋아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과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른들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니까.


엄마 옆에 자리하고 앉아 식탁 위에 놓여있는 주전부리를 집어 먹으며 오가는 대화에 집중한다. 그러다 대화 속에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바로바로 엄마에게 질문하다가 “어른들 말하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다!”라고 꾸지람을 들은 이후로는, 목소리가 들리는 사정거리 내에서 안 듣는척하며 혼자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매우 주의 깊게 듣고는 했다. 물론 궁금한 게 있어도 꾹 참고 질문하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의 입에서 나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싫증을 잘 내고 끈기가 없는 아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게 긍정과 부정의 의미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아, 나는 싫증을 잘 내고 끈기가 없는 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머릿속 깊이 각인이 되었을 뿐이다. 한 치의 의심이나 부정 없이 바로 각인된 이유는, 엄마는 옳은 말만 하고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그 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무언가를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니 도전에 성공한 적도 그리 많지 않다. 선천적 기질이 그러한 것인지 어릴 적 각인된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각인된 생각이 미미하게나마 영향을 끼쳤던 건 사실이라는 거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앞서 항상 엄마의 목소리가 스친다. “애가 뭐하나 진득하니 하는 거 없이 금방 싫증 내고 끈기가 없어.” 이 목소리는 도전에 실패한 후에 억양이 변화하여 귓가에 맴돈다. 실패를 합리화하듯이, “원래 너는 금방 싫증을 내고 끈기가 없으니까. 그런 아이니까.” 자괴감을 느낄 필요 없다며, 도피할 퇴로를 만들어 준다.


매번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껏 제대로 이룬 게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해 2월에 우연히 ‘랜선 새벽 도서관’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줌에 접속하여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임이다. 얼굴을 보일 필요는 없고 뭘 하는지만 보이면 되니 산발인 머리로 거적때기 같은 잠옷을 걸쳐도 편하게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하지만 시작하기에 앞서 또다시 그 목소리가 저주처럼 속삭이고 들었다. "싫증을 잘 내고 끈기가 없는"


거의 보름 이상을 고민했던 거 같다. 그러다가 한번 참여나 해보자 싶어 용기를 내어 모임에 들어갔다. 따듯한 환영 인사에 용기를 얻어 3월 1일부터 스타트를 끊었다. 38년을 올빼미처럼 산 나에게 새벽 5시 기상은 히말라야 등반을 앞둔 것만큼이나 부담감이 컸다. 내가 일어날 수 있을까. 정말 할 수 있을까.


처음 일주일은 밤에 일찍 자는 게 되지 않아 3~4시간만 자고 일어나 새벽 시간을 보내고 낮에 꾸벅꾸벅 졸았다. 그 후부터는 차차 밤에 잠드는 시간이 빨라지면서 새벽 기상이 몸에 습관처럼 배었나 싶었다. 그렇게 100일을 하고 나니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우선 야식을 먹지 않으니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살이 3kg 정도 빠졌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니 정신이 맑아 남편에게 짜증을 내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하게도 그 생각을 하니 도서관에서 8주 동안 진행하는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되었고, 수업이 끝난 후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소재를 정해 글을 써 서로 공유를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용기 내어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여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100일 글쓰기도 도전 중이다.(오늘로써 87일 차이다. 고지가 눈앞인데 솔직히 힘들다.)

이 모든 게 100일 동안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120 여일쯤 되었을 때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면서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새벽 기상은 하루아침에 잠자리 날개가 바스러지듯 파삭이며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한없이 나약한 모습에 나의 기질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좋은 행동을 결코 습관으로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루하루 신경을 써서 버티는 것이었을 뿐, 잠시 한눈을 팔면 관성의 법칙처럼 너무나도 쉽게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이러한 암울한 생각의 늪에 빠지려 들 때, 반문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끈기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인가.’ 


나는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낸다. 며칠 밤낮을 새서라도 일정을 지킨다.

집 밖으로 나오기 귀찮아서 그렇지 일단 나오면, 목표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낸다.

자율성이 결여된 상황에서의 규칙은 제법 잘 지켜낸다.


이 정도의 끈기는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끈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끈기는 있는 것 같다. 30여 년 전 엄마의 판단이 틀렸다.




습관을 들이면 바꾸기 쉽지가 않다. 나쁜 습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100일 글쓰기는 밤 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쓰는 걸로 습관이 들어버렸다. 다시 새벽 기상을 하려면 13일 후 100일 글쓰기가 마무리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이게 약간의 끈기가 있는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도전’이다.

밤에 하는 도전이 끝나면, 다시 새벽 기상을 시작할 거다. 끈기가 없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도전으로 인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기 힘들 것 같다.


기질이라는 게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람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MBTI나 각종 심리(성격) 테스트는 믿지 않는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몇 가지 성격 유형에 맞춰 설명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니 나 자신을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언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아이에게도 그래야 한다. 내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를 듣고 고대로 자라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 부정적인 표현은 더더욱 위험하다.


한계를 생각하면 그만큼의 선이 내 주위를 벽처럼 둘러싸지만, '한계'를 머릿속에서 지워내면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에 서 있을 수 있다. 그 공간에서 뭘 하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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