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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Nov 18. 2021

지우개의 쓸모

나의 지우개는 어떤 형태일까요


 매번 끝까지 사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물건 중 하나로 ‘지우개’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용한 지우개는 발이 달린 양 사라져 버리기 일쑤입니다. 내 곁을 떠나버린 그 수많은 지우개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예전에 TV에서 금속탐지기로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사람들이 흘린 동전이나 액세서리 등을 찾아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지우개를 찾아내는 탐지기가 있다면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 학원을 기웃거리며 보물찾기 하듯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왠지 지우개뿐만 아니라 잊고 있던 추억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요.


지우개라고 다 같은 지우개가 아닙니다.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의 지우개가 힘을 적게 들이면서 종이를 훼손하지 않고 잘 지워질 확률이 높습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깨끗이 연필 자국을 지워내는 지우개를 만나면 ‘다음에 또 이걸로 사야지’라고 마음먹어보지만, 시간이 꽤 흐른 후 잊거나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어디선가 생겨버린 지우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지우개일까요?

이래서 지우개의 이름이 '지우개'인가 싶기도 합니다. 연필의 흔적을 지우는 것뿐만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하여 지워버리니 말입니다.


손에 힘을 주어 쓰거나 연필의 농도에 따라 짙게 쓰인 글씨를 지우기 위해서는 지우개를 잡은 손에 꾹꾹 힘을 주어 지워야 합니다. (물론 미술용 연필은 미술용 지우개가 따로 있지만, 여기서는 일반 필기구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거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앞서 사용할 때 흑연이 지우개에 남아 있다면 그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심코 흑연이 묻은 부분으로 지웠다가는 글씨가 지워지기는커녕 지저분하게 뭉개지며 검게 번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만 주의한다면 지우개는 무언가를 지우는 것에 있어 가장 저렴하고 완벽한 물체입니다.


내 마음도 이렇게 수정하고 싶은 부분을 쓱싹쓱싹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하면 잊고 싶은 기억을 깨끗이 지울 수 있다니, 세상 편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미 내 머릿속에는 지우개가 존재하고 있기는 합니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맛이 없다. 다음엔 여기서 시키지 말자.” 해놓고는 몇 달 후 같은 집에서 시킨다든지, 팽이버섯과 브로콜리를 사놓으면 대부분 썩혀서 버리면서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해.”라며 구매하는 걸 보면, 분명 지워도 지워도 줄어들지 않는 거대한 지우개가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지우개는 원하는 것을 골라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망각하게 할 뿐이니, 내가 바라는 지우개가 아니네요.


머릿속과 가슴속에 지우고 싶은 기억이나 감정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치유의 힘을 빌려 지워내려 합니다. 그것이 음악이나 미술, 음식, 수면, 쇼핑, 운동일 수도 있고 혹은 의학을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지요. 무엇이 되었든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나의 지우개는 어떤 형태일까요. 아직 명확한 지우개를 소유하지 못하여 찾아보려 하는데, 지금까지는 '맥주'가 가장 유력한 것 같습니다.

 

사실 지우개로 흔적 없이 지웠다고 해도 종이를 들어 빛에 비추어보면 연필 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완벽하게 지운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무엇이든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한번 들어온 것들은 어디든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깨끗이 지워 없앴다고 생각해도, 우연한 순간에 의도치 않게 기억과 감정들이 다시 끄집어내 질 수 있는 거죠.

그러니 무엇이 되었든 각자에게 꼭 맞는 지우개를 찾아내는 행운을 얻길 바랍니다. 언젠가 꼭 필요한 때가 오면, 알차게 쓰고는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해 두세요. 또 필요한 때가 올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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