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다 Dec 31. 2022

끝나지 않는 나의 정리정돈법


 또다. 또 그 버릇이 나오고야 말았다. 

할 일은 최대한 뒤로 미루기. 미룰 수 있는 일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기. 이건 늘 항상 하는 것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최근 오랜만에 나 스스로를 당황케 하는 버릇과 조우했다. 바로 미친 듯이 집안을 뒤엎어 정리하는 거다. 무려 3일 동안. 1년에 한 번 발현될까 말까 한 이 버릇은 해야 할 일은 있는데, 생각이 많아질 때 치고 나온다. 정리를 하며 생각을 안 하는 거다. 

     

나를 이루는 수많은 세포를 아무리 헤집어봐도 정리정돈의 개념을 가진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정리정돈하는 법을 모르고, 설사 했다하더라도 유지되는 건 채 하루도 가지 못한다. 나름의 자리에 가지런히 정리한 물건들은 어느새 제멋대로 흩어져있다. 예상치 못하는 곳을 나뒹구는 물건 속에서 용케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은 과히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으로 인해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3일 전부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정리정돈이 아니라, 집안의 가구 배치를 뒤엎어버리는 수고를 한다. 이면지에 거실과 각 방의 가구 배치를 새로 할 스케치를 한 다음 혼자서 낑낑대며 사부작사부작 옮기기 시작했다. 그간 정리를 하지 않고 산 덕에 가구 하나를 옮길 때마다 두둑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가구 안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물건들을 정리한다. 그러다 보니 정리 속도가 느려 하루에 한 곳 씩(방 하나) 정리하느라 3일이나 걸렸다. 

    

무거운 가구를 밀고 끌고 들고 나르느라, 두터운 지방 탓에 튼실해 보이는 허리가 쑤셔온다. 3일간 정리하며 느낀 것은, 나는 생각보다 라인을 쓸데없이 잘(집요하게) 보는 사람이라는 거다. 가구 배치를 할 때 벽에 딱 붙이지 않고 가구를 약간 떼어 놓는다. 그런 후 줄자를 들고 가구 양 끝의 공간(벽과 가구 사이)이 0.1mm라도 차이 나지 않도록 한다. 두 가지의 가구를 같은 라인으로 바로 붙여 놓을 때도 어느 것 하나 0.1mm라도 튀어나오지 않도록 한다. 내가 이리 피곤한 사람인 줄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래서 평소에 정리를 안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한다. 스스로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아니까.

     

그러고 보면 정리정돈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과거 기획자로 일할 때 1픽셀의 어긋남을 찾아내는 매의 눈을 갖고 있어 종종 디자이너들의 원성을 듣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부분의 흐트러짐을 남들보다 잘 찾아내는 내가, 정리가 안 된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물건들과 함께 뒹구는 걸 보면 이 또한 능력이 아닌가 싶다. 어디에 유용하게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흔하지 않은 능력인 부분은 마음에 든다. 

    

난감한 건 이상하게 한 군데 정리를 끝내고 다른 곳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앞서 정리한 곳이 다시 어질러져 있다는 거다. 물건은 제자리를 쉽게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기 바쁘다. 더 큰 문제는 이러다 보니 3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정리를 끝내지 못했다. 방 하나에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물건들이 탑처럼 쌓여버렸다. 경험상 나는 여기서 정리를 그만두는데, 그러면 어느새 탑의 물건들은 자유를 찾아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새로운 아수라장을 형성한다. 이 상태로 1~2년을 살다가 또 어느 순간 집안을 뒤엎는 버릇이 발현되면 다시 3~4일은 허리가 휘도록 느긋하게 정리를 하다가, 정리되지 않은 마지막 한 공간이 남으면 정리를 멈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리를 마무리해 보겠다며 굳게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마지막 정리해야 할 공간을 그대로 놓아둔 채 오랜 기간을 거리낌 없이 보내다, 갑작스러운 정리정돈 의욕이 발현되면 그때 다시 '정리되지 않는 정리'를 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매번 정리되지 않은 공간에 녹아들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능력치는 레벨업 되겠지.      


정리정돈 유전자가 없는 사람에겐 정돈되지 않은 공간을 편안히 누리는 능력치가 어마무시하게 높을 것이다. 역시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생존에 강하다.




작가의 이전글 새벽형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