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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Nov 01. 2021

게으름뱅이의 여행 일정

 

 여행을 떠나는 장소와 하루에 한 가지의 일정만 잡는다면, 나머지는 계획하지 않고 출발합니다.

나의 모든 행의 목적 '휴식'이라, 현지인의 일상을 느낄 수 있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여행을 선호합니다. 마음 편한 동네 백수 청년 같이 말이죠. 기상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배고플 때 밥을 먹습니다. 정해놓은 일정은 딱 하나이니, 하루 중에 그 하나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니, 여행을 와서 한껏 여유를 부려봅니다.


그렇기에 일정을 시간 단위로 알차게 계획해봤자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회사에서 포상휴가로 태국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여행사 패키지로 간 거라 기상 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의 일정이 빽빽하게 짜여 있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동안의 피로와 심적 스트레스를 풀어낼 거라는 기대로 비행기에 올랐지만,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일정에 오히려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었습니다. 결국 중간에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몇 가지의 일정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맛집도 검색하지 않습니다. 맛집이라고 소개되어 있어도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데다, 인터넷에 검색될 정도면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줄을 서야 하는 경우가 매우 높습니다. 보다는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로컬 식당에 갑니다. 길을 걷다가 깔끔해 보이고, 손님이 어느 정도 있으면 들어갑니다. 이러면 간혹 실패할 경우도 있지만, 진정한 맛집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여행지에 가면 그곳의 전통시장을 방문합니다. 특산물도 볼 수 있고, 그 지역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어 빠트리지 않고 일정에 꼭 넣어 놓습니다. 주전부리를 손에 들고 시장 구경을 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요. 오래된 단층의 건물들과 여기저기 달려있는 간판을 읽고 의미를 생각하는 재미, 사람들 사이사이로 어깨를 부딪히지 않게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와 이것저것 맛보며 걸을 수 있는 공간까지 모두 좋은 기억으로 스며듭니다. 

 

계획 없이 움직이다 보면 의외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초행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점을 발견했다던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을 알아보지 않아 아무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다가 상대방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숙소 주변을 산책하다 해가 뜨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냅니다. 이럴 땐 오래전 해적들이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하는 기분입니다.


물론 일정을 계획적으로 정해 버려지는 시간 없이 알차게 여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여행의 여유로움을 맛본 저로서는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지속할 것 같습니다. 무계획으로 인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무계획으로 인해 흘러가는 시간 동안 차근차근 여행 후의 일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있습니다. 낯선 곳을 느긋하게 산책하고, 현지인처럼 로컬 식당에서 능숙하게 주문을 해보고, 그곳의 풍경과 건물 그리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길을 걸으며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행에서 꼭 무언가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얻는 게 있든 없든 내가 즐거우면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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