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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Dec 16. 2019

자판기의 꿈

N잡 꿈나무, 회사 생활에 임하는 자세 2


일 년 쉬다 오면 좀 다를 줄 알았지


일년의 무급휴직기간 동안 멘탈과 체력이 업그레이드되었으니, 같은 회사로 돌아가더라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복직 첫날 잘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끌려들어간 첫 판매 회의에서, 나는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복직 후의 마음은 절벽 앞에 선 사람 같았다


회사는 나 하나가 달라진다고 달라지는 조직이 아니었다. 회사는 거대한 조직이고, 여러 사람과 연결된 유기체이며, 구성원의 행복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해 힘쓰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내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내 개인의 의욕과 노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를 쭉 이어 다니면서도 그걸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휴직과 복직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전의 나는 내 느낌과 감정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직 전에는 회사에서 내가 힘든 이유가 내가 예민해서,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 이상주의자여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 년을 놀고 복직해서 누구보다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회사를 마주하니, 전에 보이지 않던 회사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내 느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 회사는 원래 힘든 곳이구나.

회사는 원래 시키는 일을 하는 곳이구나.

여기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여기서 아무 것도 아니구나. 아무것도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그럴 수밖에 없네. 


이 아픈 깨달음 이후 나는 조금씩, 나 자신과 회사/회사 일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이중간첩 생활의 시작 : 딴짓과 N잡


하고 싶은 걸 회사 안에서는 할 수 없다면, 회사 밖에서 해 보기로 했다. 회사 안에서는 못 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독립출판이라는 딴짓을 시작한다.


퇴근 후 노트북 앞에 앉아 어도비 프로그램에 그동안의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 주말에는 충무로 인쇄소에 가서 표지 시안을 뽑았다. 연차와 반차를 쓰면서 작업했다. 그렇게 이중간첩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첫 독립출판물 <오늘부로 일 년간 휴직합니다>를 만들었다.



출처: 소심한책방 인스타그램



감사하게도 몇몇 독립책방에서 책에 대해 좋은 리뷰를  남겨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책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현대는 과연 인플루언서의 시대임을 실감했다. 안 팔리면 평생 라면받침으로 쓰지 뭐, 했던 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2쇄를 찍게 되었다. 


이직, 휴직, 퇴사 등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공감하며 읽었다고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회사생활에선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뿌듯함을 느꼈다. 사실 그 글은 복직 후 생각과 다른 현실 앞에서 '이럴거면 휴직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 싶어 마음이 푹 꺼진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글이었다. 그런데 그 글이 남에게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다니. 


독립출판을 하고 몇 달 뒤, 콘텐츠를 좋게 봐 준 출판사를 만나 정식 출간계약을 했다. 다시 회사의 근로계약과 출간계약을 병행하는 이중간첩같은 나날을 지나(인사팀의 허락을 받았다), 같은 제목의 책이 빌리버튼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었다. 


http://m.yes24.com/Goods/Detail/73022527


두 가지 계약을 병행하고 있으니, N잡까진 아니어도 1.7잡까진 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고 싶고, 글쓰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0.2잡, 0.3잡들을 병행하고 싶다. 반드시 등단을 하고 전업으로 글을 써야만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범한 30대의 생활인으로서 지금 내가 살고 일하는 자리에 두 발을 붙이고 서서, 이 자리에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달라진 회사생활


사람책 발표를 마치고, 한 분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셨다. 휴직 전에는 자판기같이 일했다고 하셨는데, 복직 후 글을 쓰기 시작하고 책을 낸 뒤에 회사생활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냐고 물었다. 답변을 따로 생각해 왔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이 나왔다.


"음...... 이전이랑 달라진 것은 사실 거의 없는데요. 저는  메일을 열심히 씁니다."


듣던 사람들의 표정에 ?? 하고 물음표가 떠올라 급히 덧붙였다.


"어... 그냥 업무 메일을 쓸 때도, 읽는 사람이 좀 이해하기 쉽게 메일을 쓰려고 노력하고요. 잘 쓴 보고서를 보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는지 보고, 괜찮은 부분은 저도 따라 해 보려고 합니다. 그걸 저희 부장님이나 임원이 알아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냥 저 혼자 합니다."


책을 내고 나서 처음에는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넘쳐서, 회사일을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회사일은 그나마 갖고 있던 창조성마저 녹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전업으로 글만 쓰는 동년배의 작가들을 보면 그럴 깜냥도 없으면서 괜히 부럽고 질투가 났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마음을 달리 먹었다.

회사 생활도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연습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메일을 쓸 때는 기승전결을 갖춰서 보는 이가 헷갈리지 않도록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PPT나 워드 보고서 자료도 큰 틀에서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가 개연성 있게 흘러가도록 노력한다. 보다 설득력 있는 구두보고를 하려고 문장 간의 연결을 다듬는다.


물론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들인 노력만큼 고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나의 상사들은 내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걸 영영 알지 못하겠지. ("...네가?", "...이게?"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누가 알아주고 말고 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도 꿋꿋하게 내가 하려고 하는 걸 하는 것, 그리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나의 작은 성장에 혼자 조용히 기뻐하는 것  행복의 비결이라고 믿게 되었다.


회사란 궁극적으론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 내가 생각한 이야기와 위에서 원하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그럴 땐 프로페셔널한 대필 작가의 마음으로 회사의 방향을 반영해서 고친다. 이건 회사 일이니까! 도저히 아닌 것 같은 일에는 한번 살짝 반항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론 나보다 월급 많이 받는 선배 자판기들의 의견을 따른다.




그래 봤자 자판기, 그래도 좀 더 좋은 자판기를 꿈꾼다


사람책 발표 후 뒤풀이에서, 옆자리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를 10년 넘게 다니신 분이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회사를 별로 힘들지 않게 다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놀라며 비결을 묻는 나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자판기죠 사실. 근데 좀 더 좋은 자판기가 되려고 노력하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회사를 나갔을 때, 뭐... 바리스타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추운 겨울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판기지만, 더 좋은 자판기가 되려고 노력하죠.' 라는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회사를 자아실현의 장으로 이상화하고 싶진 않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시키는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곳이다. 본질적으론 나는 일개 부품이자, 자판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걸 잊고 회사에서 학문이나 예술, 자기 사업을 하려 하면 힘들어지기 쉽다.


다만 큰 틀에선 자판기일지라도, 좀 더 좋은 자판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냥 시키는 대로 네네,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좀 더 잘 되게 하는 방향으로 내 생각을 조금 넣어 보는 것. 비유하자면 오더 받은 율무차에 견과류를 좀 더 넣어 본다거나, 날씨가 추운 날에는 마시는 사람을 배려해 좀 더 뜨거운 커피를 낸다거나 하는 식이다.


누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주 40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나를 위해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청춘을 월 단위로 끊어다 회사에 팔고 있으니까. 월급도 소중하지만 내 시간도 그만큼 소중하니까. 한때 트위터에 유행한 "이렇게 입으면 내 기분이 조크든요" 짤처럼, 영혼없이 살면 내 기분이 안 조크든요!


이 귀한 시간을, 누구 좋으라고 영혼 없이 살아.


좋은 커피를 만드는 자판기가 되려고 할 때, 역설적으로 생활의 중심은 회사에서 나로 이동한다.


자판기지만, 바리스타의 꿈을 꾼다



언젠가는 이 자판기 생활 드러워서 못해먹겠다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고작 자판기 주제에 하마터면 또 열심히 살 뻔했네, 하고 혀를 끌끌 찰 수도 있겠다. 평생 커피 같은 건 만들지 않아도 되는 건물주의 삶을 맹렬하게 꿈꿀지도 모른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복직 후 2년을 마무리해가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자판기라면, 좀 더 좋은 자판기가 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 살금살금 내가 원하는 바를 커피에 집어넣고,  갑갑해서 일 못하겠다 싶을 때는 '자판기 고장' 붙여놓고 급 휴가를 내기도 하고, 도저히 마음에 안 가는 커피는 대충 만들고(침은 뱉지 말자 그래도), 잘 만들고 싶은 커피에는 1g의 영혼을 담기도 하면서.


그러다 언젠가는,

남이 시키는 커피가 아니라 내 커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 월요일 출근을 앞둔 자판기의 .

그리고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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