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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Jan 05. 2020

가장 맛깔스러운 새해 다짐

내가 먹고 싶은 걸 최대한 맛있게 먹는 사람 되기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몇(십)년이 지나도, 마음에 오래 남는 교과서 속 문장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이라는 김첨지의 말(현진건, <운소 좋은 날>)일 수도 있고, “느 집에 이거 없지?”라는 점순이의 명대사(김유정, <동백꽃>)일 수도 있다. 평소엔 잊고 살던 이런 문장들은 인생의 큰 파도가 치는 순간 수면 아래서 짠 하고 나타나 나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한 문장이 되곤 한다. 오늘따라 할 일이 없어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딴짓을 하며 친구들과 퇴근 후 약속을 잡았는데 저녁 6시쯤 부장님이 일을 시킬 때, 부들부들 떨며 카톡창에 쓰는 것이다. “아쒸…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나에게는 그 교과서 속 강렬한 한 문장이 다산 정약용의 말이었다. “상추쌈 싸 먹으나 김치 담가 먹으나 똑같이 똥 된다.” 아니 다산이 언제 그런 말을 했나?라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일부를 소개한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고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 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 삼키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싫어한다.
(중략)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덩이를 삼키고 있을 때 구경하던 옆 사람이 "상추로 싸 먹는 것과 김치 담가 먹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답해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하여,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다산 선생은 쌈을 싸 먹는 거나 김치를 담가 먹는 거나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방법” 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심지어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들에 노란 형광펜을 치고, 하이테크 펜으로 필기를 했다. 그때부터 다산의 말은 내 마음속에서 “맛있고 좋은 거 먹어봤자 똑같이 똥 된다.”라는 거친 문장으로 요약되어 마음에 깊이 새겨져 버렸다.



고마 이래 묵으면 되는데 말라꼬

다산의 말은 아빠가 식탁에서 자주 쓰던 말과 닮아 있었다. 오늘따라 밥상이 소박하다 싶을 때, 엄마는 “오늘 반찬이 마이 없네. 뭐 계란후라이라도 하나 해주까요?”라고 물었고 아빠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됐다. 말라꼬, 고마 이래 묵으면 되지!"


이상하게도 엄마를 배려한 것임이 분명한 그 말 앞에서, 엄마가 정성 들여 차린 찬들은 ‘고마 이래 묵으면 되는 것’이 되어 갑자기 빛을 잃곤 했다. 밥, 김치, 나물 한 종류, 멸치볶음이나 장아찌 등 밑반찬으로 구성된 밥상을 아빠는 우적우적 씹어 묵묵하게 먹어치웠다. 반찬이 애매하게 두어 숟가락 정도 남으면 “이런 건 고마 다 먹어치워버려야 된다.” 하면서 싹싹 긁어 드셨다. 그러면 나는 "아니 아빠 왜 먹어치운다고 해… 먹기 싫으면 남기면 되지 왜 억지로 먹어…”라고 질색했지만 늘 근면성실한 아빠는 밥상 앞에서도 근면성실함을 잃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두 분 다 소화기관이 약한 편이라, 평소에도 과식을 멀리했고 미식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아빠는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위장이 좋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어 늘 소식하고 음식을 가려먹도록 가르쳤다. "딱 한 숟갈 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한다"가 저녁식사의 단골멘트였다. 짠 것, 매운 것, 기름진 것 등등 피해야 할 음식의 리스트는 길었지만 맛있게 먹는 음식의 리스트는 비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자다가도 생각만 하면 입에 침이 고이는 음식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빠의 “고마 이래 묵으면 되지 뭐!”라는 말은 다산 선생의 “김치 담가 먹는 거나 상추쌈 싸 먹는 거나 입을 속여 먹는 것일 뿐”이라는 교과서 속 문장과 합쳐져 내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건 무용한 즐거움을 절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였다.


맛집 탐방과 미식이 대세인 요즘 같은 세상에서 용감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미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며 “다음엔 뭐 먹지?”를 고민하는 즐거움에 잠깐 발을 담가보려 할 때마다, "꼭 그렇게까지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하는가? 어차피 똥 될 것을..." 하고 내 안의 다산 선생이 저지한다. 십 년을 만난 P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실 그건 나도 모른다. 나는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할까?


미식의 기쁨을 미디어를 통해 배우고 있다




어떻게 맛있는 것만 먹고 살아

오랫동안 인생은, 우리 아빠가 그러했듯이,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불평 없이 건실하게 묵묵히 ‘먹어치워’ 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뭐 별거 있나 고마 이래 묵으면 되지, 가 진정한 어른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내 입에 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건 반찬투정하는 어린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맨날 지 입에 좋은 것만 먹나,  라는 대사를 누가 먼저 하기 전에 가장 먼저 쳤다. 그렇게 내 몫의 밥을, 맛이 없어도 숟가락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묵묵히 다 비워내는 으-른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고개를 들었더니, 아 이렇게 맛없는 걸 이렇게 맛없게 먹고 있는 내가 불쌍해,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초딩처럼 “나 이거 싫어하는데!” “난 저게 먹고 싶은데!” 하고 반찬 투정을 한다. 그리고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끈질기게 찾아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야 만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에 반드시 비를 보고야 마는 인디언들처럼... P 역시 그런 사람인데, 그는 “이거 먹어야지!”하는 생각이 들면 정확하게 그 음식을 하루 이틀 안에 꼭 먹는다는 것을(즉석떡볶이가 먹고 싶은데 그냥 떡볶이를 먹는 식으로 타협하지 않고) 자긍심으로 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설령 맘에 들지 않는 밥상을 받더라도, 최대한 본인의 입맛에 맞게 쏙쏙 골라먹으며 최대한 식사를 즐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음식 자체를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내가 맛있게 먹는지가 더 중요하다.  쌈채소를 차곡차곡 쌓아 커다란 쌈을 만들어 남 이목을 신경쓰지 않고 입안에 앙 집어넣는다. 음식에 어울리는 소스를 잊지 않고 꼭 곁들여 야무지게 찍어먹고, 무슨 소스는 없냐, 뭐를 더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게 얼마짜리 밥상인데, 라는 본전 생각을 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는다.


야무지게 잘 먹는 사람은 '먹을 줄 안다'는 찬사를 듣는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1) 본인이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안다.

2) 그것을 끈질기게 찾아서 먹는다.

3) 결과적으로 그걸 못 먹게 되어 맛없는 밥상을 받더라도, 최대한 본인이 먹고 싶은 걸 골라서 먹고, 최대한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그들은 늘, 맛있게 먹는다.


어우 그렇게 해서까지 먹고 싶은 걸 꼭 찾아먹어야 해?라고 팔짱 끼고 고상한 선비처럼 그들을 관찰하던 나는, 내가 꾹 쥐고 있던 숟가락을 멍하니 든 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묵묵하게 먹어치우는 으-른의 자세 좋지, 근데 왜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들이 더 즐거워 보이는 걸까?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인생은 내 앞에 주어진 것을 수행하듯이 삼키고 소화시키는 장인가? 아니면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맛있게 먹고 즐기는 장인가?



2020년 새해 다짐, 내가 먹고 싶은 걸 찾아 먹는 삶

올해는 다산 선생의 말을 조금 벗어나 살아보고 싶어졌다. 2020년이라는 아직 입에 붙지 않는 새로운 해에, 내 새해 다짐은 이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자. 그리고 최대한 맛있게 먹자.

나를 맛없음 속에 던져두지 말자.

먹기 싫을 땐 먹지 말고,  남 눈치 보며 맛있는 척하지 말자.

아무리 비싼 음식이어도 내가 배부르면 숟가락 놓자.


인생을 그런 자세로 살자.

내 안의 고상한 선비정신을 버리고, 구차하고 유치할지언정 내 욕망을 끝까지 따라가 보자는 다짐.


다산은 이거나 저거나 입을 속여 먹는 방식일 뿐이라고 했지만, 나는 김치와 배추쌈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는 건 위장의 입장이다. 혀와 눈과 코를 가진 내 입장에선 아주 다르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는 건 원래 힘든 거라고, 사람이 어떻게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냐고, 직장생활 다 거기서 거기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 말은 끝까지 내 욕망을 따라가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지치고 슬픈 나를 스스로 위로할 때 쓰는 말이어야 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사는 게 원래 그렇대, 원래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거래.”하고 내 욕망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데에 쓰고 싶진 않다.


다산의 글은 제목 그대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다. 최선을 다해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세상의 끝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다독이기 위한 글. 맛있고 기름진 것을 먹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빈한한 밥상을 받는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않기 위한 글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근과 검이라는 원칙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마음에 지녀, 잘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이고, 또 한 글자는 검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유배지에 들어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했을 때, 다산의 글만큼 품위 있는 말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의 원칙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유배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저함 없이 끝까지 따라가 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싶다.



그래서 올해는 때론 유치하고 때론 탐욕스러울지언정 자기 욕망을 정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되자고 마음먹어 본다.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거라고 눙치지 않는 사람. 이 회사와 저 회사는 달라. 나는 이 일이 아니라 저 일이 하고 싶어. 나는 이런 걸 먹고 싶어, 나는 저런 걸 싫어해, 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루 두세 끼의 식사는 이걸 연습할 수 있는 좋은 장이다. 세 끼를 가능한 한 맛있게 먹고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그걸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면서 인생 또한 조금씩 그런 자세로 살아가고 싶다.


이런 나를 보고 다산 선생이 다시 또 “상추쌈 싸 먹으나 김치 담가 먹으나 그건 네 입을 속여 먹는 방식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기죽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쌈 싸 먹는 거랑 김치 담가 먹는 건 아주 다른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이 맛없는 김치만 먹어봐서 그래! 완전 달라! 전혀 같지 않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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