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Feb 27. 2020

내가 사랑하는 회사어

짜친다는 말


밥벌이의 짜침에 대하여 

사전상 '짜치다'는 경상도 방언으로, '쪼들리거나 궁핍한 상태'를 말한다. 나는 입사 후에 이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용례는 다음과 같다.

"부장님, 상무님 요청하신 작업을 하려면 A, B, C 데이터를 다 같이 봐야 하고 D, E 부서가 같이 움직여줘야 해서 좀 짜칩니다." (자잘한 밑 작업을 많이 해야 해서 공수가 많이 든다는 의미로, 대개는 이만한 수고를  들여 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

"아 요새 회사생활 일은 많고 보상은 없고 진짜 짜친다." (살기가 퍽퍽하고 지치고 여유가 없다는 의미)

이 단어는 내 입에서 나오면 스스로가 정말 불쌍해지는 말이다. (내가 요새 맡은 제품 다 완전 짜쳐./ 사는 게 왤케 짜치냐.) 가능하면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윗사람의 입에서 이 단어가  나올 때는 상황이 다르다. "야 일단 해보다가 짜치면 바로 말을 해.", "상무님, 밑에 애들 시켜서 해볼려고 했는데 수요일까지 하기는 좀 짜칩니다. 금요일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들이다. 짜친다는 용어가 너무나 정확하게 실무자의 짜침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 말이 관리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크게 이해받은 기분이 되고 만다.

짜친다는 말을 입밖에 내뱉을 줄 아는 상사는 본인도 많이 짜쳐 본 사람이다. 터무니없는 상사의 지시에 한 올 한 올 엑셀 열과 행을 헤아리며, 또는 워드의 반짝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날밤을 새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어감상 아름답지는 않은 짜친다는 실무 용어를 나의 상사가 자신의 상사(임원)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가 실무자의 편에 서서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상사가 나의 짜침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대개 상사의 상사(임원)쯤 되면 짜친다는 감각 따위 잊은 지 오래여서, 밑에 사람들의 고생을 헤아려 주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사의 반항은 짧게 끝나버리고 만다. ("네, 상무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럼 수요일까지 어떻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그런 상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확히는 그의 지친 목덜미와 잔뜩 솟은 어깨를 보면서 리더의 고단함에 대해 생각한다. 아, 우리 모두 정말 짜친다.




난세의 영웅들, 아니 짜칠 때의 영웅들

짜치는 일을 맡으면 제일 먼저 필요한 건 생활의 달인이 아니라 엑셀의 달인이다. 엑셀의 달인들은 복잡한 문제를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신의 가호를 통해 가장 단순하게 풀어낸다. 문제지를 들고 엑셀의 달인 앞에 서면 나는 아기의 말을 쓰는 사람이 된다. 베이비토크를 시작한다. "이 DB랑 저 DB를 이케이케 말아서 딱 클릭하면 요거가 촤라락 보이게, 무슨 느낌인지 아시죠? 근데 이게 되나요?"


그들은 "음... 될 것 같은데, 한번 볼게요!" 하고 나서 한 시간 뒤에 자동화된 파일을 만들어 보여준다. 촥, 촥, 촥, 촤라락. 올- 나는 박수를 치며 감탄한다. "아 엑셀이... 이런 것도 되는군요!" "그럼요."


엑셀의 달인은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신과 우리 머글들 사이를 통역해 주는 신성한 통역사다. 샤론 최 뺨치는 그들이 있어 우리의 퇴근시간이 24시간 빨라진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설득의 달인이다. 만들어진 데이터를 가지고 옆 부서를 움직여야 할 때는 누구보다 설득의 달인들이 필요하다. 설득의 달인은 대개 엑셀의 달인과는 다른 성향을 갖고 있으며, 누구보다 사내 카페를 많이 이용하고 소문에 밝다. 혹자는 그들을 결과물 없이 말로만 일한다고 험담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자질은 고집불통의 유관부서들을 설득할 때 빛을 발한다.


고압적인 임원 앞에서, '프로세스'만을 강조하는 다른 부서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종일관 우리 부서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그들은 옆에서 뭐라 뭐라 해도 절대 굴하지 않고 우리의 입장을 계속 대변한다. "아우 그래도 우리 진짜 이거 해야 돼요."


상대방이 전화를 걸어 그게 안 되는 이유를 한참 동안 이야기하면, 그들은 네네 하며 차분하게 듣다가(안 듣는 걸 수도 있다) 이 말을 덧붙이며 전화를 끊는다.

"근데요 부장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이거 꼭 할 거예요. 다음 회의 때 뵈어요. 커피 사갈게요."


그 통화 내용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아... 저 분과 다른 팀이 아니고 같은 팀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달인들 사이에서 종종거리며 도움을 구하면서, 누추한 나는 오늘치의 짜침을 뚫고 나간다. 뚫고 나간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내일도 어느 정도는 짜칠 것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의 리스트는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닷물 같다. 우리는 그 바닷물을 열심히 퍼담아 하루치 맷돌을 돌려 소금(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바다에 비하면 미약한 한 줌 치 소금이지만, 그래도 이만큼 해치웠다는 것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뿌듯함을 느껴본다.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면 만들어진 소금에 또다시 바닷물이 끼얹어져 있기 마련이고... ("위에서 추가 지시가 있어서 방향 다 바뀌었어. 작업 다시 해야 되겠네.") 우리는 처음 있는 일도 아니란 듯이 다시 맷돌을 돌리기 시작한다. "아, 짜친다!" 이렇게 입에 딱 붙는 찰진 단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짜친다는 말을 노동요 삼아 오늘의 소금기 어린 맷돌을 돌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맛깔스러운 새해 다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