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Oct 29. 2020

가을 마음엔 드라마 다시보기를

<천일의 약속>을 다시 보는 시간

아침저녁으로 날이 쌀쌀하다. 출퇴근길 발끝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면 정말 가을이구나 싶다. 가을맞이 의식으로 누군가는 살이 오른 가을 전어를 먹으러 가고 누군가는 올해 신상 트렌치코트를 산다. 그리고 나는 드라마 <천일의 약속> 다시보기를 시작한다.


<천일의 약속>은 무려 2011년에 방영한, 자그마치 9년 전의 김수현 작가 드라마다. 수애와 김래원이 주연을 했다. 극 초반의 배경이 가을이라 주인공 수애는 아름다운 가을 색감의 재킷, 원피스, 트렌치코트를 매회 입고 힐을 신은 채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또각또각 걸어 퇴근한다. 맨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때 나는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생이었는데, 아름다운 수애와 김수현 작가 특유의 문어체 대사를 보며 우아한 어른의 삶에 대한 로망을 품었다. 물론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극 중 수애는 어렸을 때 아빠가 일찍 죽고 엄마는 도망을 가 버려 고모네에서 자란다.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재능이 있지만 출판사에 다니며 남의 책을 만들어 돈을 번다. 그동안 열심히 돈 벌어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은데, 자꾸 기억력이 떨어져 병원에 가니 알츠하이머라고 한다. 이제 겨우 서른 살인데.


김래원은 부잣집 딸과 결혼을 앞두고 수애와 시한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수애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자 결혼 전날 파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모두의 반대를 이기고 수애와 결혼해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킨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신파의 정석, 신파의 성경이다. 젊고 창창한 나이에 병에 걸린 여주,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약혼녀를 버린 남주, 그런 남주에게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라고 뜯어말리는 남주의 어머니, 남주에게 버림받았지만 지고지순한 순정을 잃지 않는 구 약혼녀까지.

극 중 사람들은 많이도 운다. 부모님 없이 누나랑 둘이서 씩씩하게 살아온 남동생은 열심히만 살아온 누나가 불치병에 걸린 것이 가여워 운다. 불쌍한 우리 조카 이제 시집만 보내면 된다고 싱글벙글하던 고모는 조카가 치매라는 걸 알고 대성통곡한다. 자기 집에 더부살이하던 사촌을 질투하던 사촌언니는 사촌의 치매 소식에 아니 이게 말이 돼? 어? 이게 말이 되냐고... 하면서 흐느낀다.

드라마 속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물바람들을 보고 있자면 어떤 울음에서는 나도 같이 걸려 넘어진다. 눈물을 찔끔거리다 보면 아, 인공눈물 없이 눈시울이 축축해진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모난 모니터 앞에서 네모나게 굳어버린 마음이 유일하게 말랑말랑 해지는 순간이다.

어떤 장면에선 이건 조금 투머치 신파가 아닌가 싶다가도, 김수현 작가 특유의 도망갈 데 없는 야무진 대사들을 듣고 있자면 설득되어 버리고 만다. 김수현 드라마 속 인물들은 말할 때 망설임이 없는 사람 같다. 마음속에 이미 오늘 할 말을 다 생각해 온 사람처럼 정제된 대사를 쏟아낸다. 일상 속에서 저런 말을 쓰나 싶을 정도로 문어체일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위화감이 없다. 극 중 인물의 행동과 표정은 그 대사와 더없이 잘 어울려서 보다 보면 아이고 그래... 그럴 만하지... 하고 수긍하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수애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깡소주를 마시며 세상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게 어디 있냐고 흐느끼던 수애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지른다.

질 줄 알아? 무릎 꿇을 줄 알아? 항복할 줄 알아?
아니! 반항할 거야. 안 쓰러질 거야. 침 뱉어줄 거야!!!

침 뱉어줄 거야!!! 나는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좋을까. 몇 번씩 봤는데도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괜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노래방 가고 싶을 때 남이 시원하게 노래 불러주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회사 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쌓인 분노가 풀리는 것 같다.

그렇게 침 뱉어줄 거야!! 에피소드를 돌려보다 보면 스스로가 좀 변태같이 느껴진다. 대체 나는 왜 가을만 되면 이 드라마를 찾는가? 찬바람만 불면 왜 남의 도망갈 데 없는 불행을 관전하고 싶어지나. 재밌는 콘텐츠가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신파를, 비극을 찾는 심리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천일의 약속>은 잃어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애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고, 김래원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하루 자기를 잊어가는 걸 본다. 손쓸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인물들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부모님 없이도 혼자서 야무지게 살아온 수애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다이어리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적고 또 적는다. 김래원은 끝이 보이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훤히 보이는 고생길, 부모님에게 나쁜 아들이 되는 길을 택한다.

소주병 앞에서 소리 지르는 장면을 제외하면 서른 살에 찾아온 치매 앞에서 수애는 시종일관 우아하고 단정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내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면 나는 다음날 당장 퇴사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회사를 다닌다. 기억력 훈련을 위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출퇴근길마다 시를 외우고 혼자 끝말잇기를 다. 나 같으면 불치병 앞에 될 대로 되라며 나를 놓아버렸을 것 같은데, 그녀는 끝까지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기 위해 긴장을 놓지 않는다.





드라마 속 수애와 김래원은 여전히 그때 그 서른 즈음의 나이에 남아 있는데, 나는 어느새 드라마 속 그들의 나이를 넘어 버렸다. 삼십 대 초반이라기엔 조금 원숙한 얼굴로 김수현 작가 특유의 길고 어려운 대사를 읊는 배우들을 본다. 세상은 계속 변해가지만 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2011년에 머무른 채 같은 불행을 겪고 같은 대사를 읊는다. 심지어 이 드라마 사람들은 스마트폰도 아닌 블랙베리 폰을 쓴다! 드라마를 돌려볼 때마다 그들의 변치 않음에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이젠 드라마 속 수애의 모습이 정말 드라마일 뿐이라는 걸 안다. 유독 단아하고 예뻐 보였던 수애의 원피스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 저건 협찬이구나! 단지 회사를 열심히 다녀서는 저런 옷을 매일 다르게 입고 다닐 수가 없는 거였다. 예쁜 옷을 입은 수애는 아직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한다. 아니 회사를 다니면서 저렇게 해 떠 있을 때 퇴근할 수 있나? 옷을 보면 한여름도 아니고 가을인데, 저런 햇살 속에 퇴근하려면 5시 반에는 나가야 한다고!

나는 점점 더 편한 옷을 입고 회사에 가고 힐 따위 신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드라마 속 수애는 멋진 원피스를 입은 채 또각또각 가을 햇살 속을 걷는다. 절대 우아할 수 없는 질병 속에서도 우아하고 꼿꼿하게 끝을 향해 걸어간다. 여전히 이 드라마 속의 몇몇 장면들은 한때 내가 동경했던 것들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질 때쯤은 한 해가 두세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낙엽을 자박자박 밟으며 올 한 해 뭘 했지,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날은 집에 돌아와 화사한 예능이 아니라 십 년 전 드라마를 튼다. 창문을 살짝 열어 차가운 저녁 공기가 들어오게 한 채, 소파에 포옥 파묻혀 나의 안전하고 익숙한 세계를 감상한다. 맥주캔 하나를 까고 차가워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수애의 차분한 저음을 듣는다.

'오 년 후쯤이면 당신은 아빠가 되어 있겠지.
십 년 뒤에는 허물어진 사십 대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그때쯤이면 오늘이 누렇게 희미해진 옛날 사진 같겠지.
내려놓는지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내려놓았단 걸 알게 되겠지.
그 후로도 겹겹이 날들이 쌓여 가고

당신한테 나는 공룡시대 화석이 되겠지...'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허물어지고, 또 무뎌졌을까. 내려놓는지도 모르게 내려놓았던 것은 무엇일까. 첫 마음은 쉽게 잊히고 관성과 권태가 점점 그 자리를 대신해 간다.


나도 모르는 새 무뎌지고 건조해진 가을 마음에는 약간의 신파가 필요하다. 잃어감에 대한 이야기는 곧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행 앞에 더없이 우아한 주인공들과 그 우아함을 지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본다. 촉촉해진 눈으로 화면을 끌 때쯤이면 마음에도 물기가 어리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사랑하는 회사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