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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Dec 31. 2020

엑셀의 행과 열을 헤는 밤

21세기 야근 풍속의 기록

회사원에게 저녁 6시 반은 온몸의 오감을 동원해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주할 수 있다.

오늘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퇴근을 해도 내 뒤통수는 따갑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조합해 본다. 임원 보고를 마친 뒤 부장님이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을 때, 그것은 에잇 더러워 못해먹겠다의 "턱"이었나? 아니면 그래, 어디 한번 될 때까지 해 보자는 느낌의 "탁"이었나? 팀원들의 타자 소리는 저녁 6시를 기점으로 줄어들었는가, 아니면 더 커졌는가? 내일 임원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임원은 메신저에서 로그아웃 했는가?


그렇구. 아무리 봐도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




오피스 드라마 속의 야근은 정말로 일이 많아서인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정말 일이 많아서 야근하는 것만은 아니다. 갑자기 잡힌 보고, 뒤늦게 전달된 가이드라인, 또는 모호한 가이드로 인한 재작업, 또는 A의 작업을 받아 B가 뒤이어 해야 하는 상황 등등 총체적 비효율과 불합리의 총체가 야근이다. 오늘의 야근은 고위관리자의 불면증  호소("너네는 잠이 오냐? 나는 요새 내년 판매전략 생각하면 잠이 안 와.")과 그에 대한 중간관리자의 해석("상무님이 내일 전략보고 초안 보자고 하시네.")과 K-사원들의 순종(".")의 합작품이다.


아, 이럴 때 90년대생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Gen-G가 될 수 없는 80년대생 밀레니얼 사원은 예스를 외쳐놓고 속으로 운다. 마땅히 한계가 있어야 할 나의 근무시간은 한국  조직생활의 미덕인 눈치(Nunchi) 앞에서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다. 일 8시간, 주 40시간의 노동법은 인류가 19세기부터 투쟁해 얻은 성과지만 21세기에도 잘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와 현실의 야근이 다른 점이 또 하나 더 있다. 드라마 속 야근 장면에서는 꼭 사무실 불은 다 꺼 놓고 야근하는 주인공 책상 스탠드만 켜 놓는다. (그리고 꼭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주인공에게 "허허, 늦게까지 열심이네." 한다.) 하지만 현실의 오피스는 밤에도 전 층, 아니 거의 전 빌딩에 불이 켜져 있다. 창문만 없으면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환하다. 그리고 현실에선 대개 주인공만 야근하진 않는다. 어떤 면에서 야근은 스포츠다. 집단 스포츠다.


야근은 마음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몸이 괴롭다. 이미 정규 근무 시간을 넘긴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 앉아 있던 궁둥이는 곽티슈처럼 네모나게 변했다. 이러다 몸이 앉은 자세 그대로 폼페이 유적지의 사람들처럼 굳어지지 않을까. 계속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눈이 피곤해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꺼내 쓴다. 한곳에 집중하다 보니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이 시력 저하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봤다. 중세시대 궁정의 세밀 화가들이 그래서 눈이 빨리 멀었다고 한다. 내 이름을 남기는 예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엑셀의 행과 열을 헤다 시력을 잃을 수는 없어서 요즘은 그 일화가 떠오를 때마다 눈을 의식적으로 깜빡깜빡거린다.


하루에 8시간을 일하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집중력이 급속도로 저하된다. 나는 신입사원 시절 야근하다가 머리를 감은 적도 있다.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으면 잠이 깨며 집중력이 돌아올 것 같았다. 머리를 감는 순간은 개운하고 좋았다. 회사 샤워실에 비치된 미장센 샴푸의 향은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고 닦는다고 닦았지만 물이 뚝, 뚝 떨어지는 물미역 같은 머리가 몹시 민망했다. 드라이기 없이도 머리가 얼추 마를 즈음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야근의 신비는 매우 졸리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계속 버티며 앉아있다 보면 어느 순간 굉장히 집중이 잘 되는 시점이 잠깐 찾아온다는 것이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업무 요청도 없고,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옆 팀도 모두 퇴근해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자동으로 생각의 폴더가 착착 정리되면서 업무의 지도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 문제는 이거였네.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지만 이 감각에 절대 익숙해져선 안된다. "나는 밤에 일하면 일이 더 잘 되더라." 프로 야근러 선배들은 다 이 말을 했다. 절대 만성 야근러만은 되기 싫은 나는 이 기묘한 평화와 맑은 머리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잠시 일어난다.




팬트리에서 물을 떠 오던 중 갑자기 회사 근처에서 아주 큰 퍽! 소리를 들었다. 어디 싱크홀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나를 비롯해 야근하는 무리들은 큰 기대감을 품고 좀비들처럼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깜깜한 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말했다.

"이렇게 넷플릭스가 시작되는 건가 봐요. "


뚜둥. 귓가에 넷플릭스 시작화면 음악이 들렸다. SF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고양되었다. 싱크홀을 타고 외계인이 침공한 걸까? 이 건물만 남겨놓고 세계가 멸망한 것일까? 아니면 바깥세상에 전염병이 돌아...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시즌 첫 화 엔딩까지 도달했지만, 현실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야근을 막진 못했다.


네이버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니 옆 회사에서 작은 전기 사고가 있었고 인명 피해는 없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하자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동료는 말했다.


"그럼 그렇죠.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죠."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모니터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깜빡, 깜빡거리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머리가 정지된지 십여 분이 흘렀다. 회사 서랍에 저번 회사 축제 때 몰래 숨겨둔 카스 캔맥이 있다는 게 생각난다. 그걸 살짝 빼내 팬트리로 가서 텀블러에 얼음을 채우고 붓는 상상을 한다. 찰랑찰랑 텀블러를 흔들면 시원한 맥주가 딱. 그걸 한 모금 마시고 일을 하면 아주 잘 할 텐데. 이젠 커피를 마셔도 돌아가지 않는 이 머리에 기름칠을 해 줄 만한 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옆자리 과장님은 개코라 내 술냄새를 금방 알아보겠지. 그건 안 되겠다. 맥주는 집에 가서 마셔야지.


맥주를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의지력을 끌어모아 지금까지 한 내용을 정리해 메일을 썼다. 그리고 야근 여부를 점치던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퇴근 시점을 재기 시작한다. 상사가 담배 피우러 간 사이에 집에 가면 욕먹으려나? 혹시 더 시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를 고민하며 앉아 있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른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은 충분히 한 것 같고 이제는 엑셀도 워드도 도저히 못 들여다보겠다.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으로 '의-리'를 보여야 할까? 어차피 월급은 정액제인데. 고과 결과도 이미 나온 것 같은데. 속으로 합리와 눈치가 싸운다.


마침내 합리가 손을 드는 순간, 나는 소리 없이 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텀블러를 씻고 먹던 과자봉지를 치우고 책상 서랍을 잠그고 서서히 로그아웃을 한다. 가방을 잡고 조심스러우나 날렵한 몸짓으로 일어난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말은 작게 해도 이상하게 크게 울린다. 팀원들이 앉은 자리를 향해 오른쪽으로 꾸벅, 왼쪽으로 꾸벅, 성의 없이 몸을 접어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온다. "네, 들어가세요." 지친 팀원들도 영혼 없이 대꾸한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각자의 집에 도착해 있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중에 보이는 큰 유리 통창을 통해 검은 밤을 배경으로 아직 조명이 꺼지지 않은 고층빌딩들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조명 덕분에 스와로브스키처럼 반짝반짝 빛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떨까. 저 건물의 누군가도 나처럼 엉덩이가 아플까. 나처럼 인공눈물 히알루론산 0.15%를 쓰는 사람이 저 건물의 밤을 밝히고 있을까. 그들도 나처럼 내가 이것만 하고 집에 가서 맥주 마신다, 하고 네 캔 만원에 무슨 안주를 곁들일지 생각하며 빠른 속도로 키보드 위를 달리고 있으려나. 언젠가는 이렇게 큰 건물에 많은 사람들을 가둬 놓고 늦게까지 일을 시키던 시대가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의 시대로 기록되는 날이 오기를. 그런 염원을 담아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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