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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Feb 04. 2021

알파벳은 절대 알지 못할 것들

연말 평가에 대처하는 자세

고과 면담(이라 쓰고 통보라 읽는) 사무실의 공기는 특이하다. 한 명씩 불려가 부서장과 면담을 하고, 늘  예상보다 짧은 면담을 마친 후에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혼자 씩씩대다 친한 동료와 같이 사내 카페로 사라진다. 누군가는 메신저로 쓰린 마음을 토로하며 앞으로는 받은 고과만큼만 일을 하리라 굳게 다짐한다. 누군가는 마음속에 조용히 차오르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연봉 상승률을 계산해 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고과를 받은 오늘만은 빨리 집에 가야겠노라고, 오늘은 태업을 해도 되는 날이라고 내심 생각한다.


이번 고과 면담일에 내가 맡은 배역은 혼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속상함을 삭이는 사람이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앉자 모니터 화면에 내가 받은 알파벳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작년에 열심히 일한 시간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십 분 전의 긴장감은 곧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최종 고과권자가 결정한 나의 고과는 그저 단순한 알파벳에 불과했다. 그 짧은 글자에는 내가 몇 번을 고치며 열심히 써낸 본인 평가라던가, 미약한 정치력을 긁어모아 나를 어필했던 시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알파벳만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내가 애썼던 시간들은 모두 휘발되어 버리고 남는 건 오직 그 알파벳뿐일 것이다. 그 알파벳만이 남아 내가 받을 돈과 사내 교육, 연수 기회, 무엇보다 다가올 승진 심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사내 카페에 내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왔다. 빨대로 맹렬하게 몇 모금을 마시니 속의 화기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그락달그락 흔들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시고 있자니 문득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옆 사람은 무슨 평가를 받았을까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자기 성에 차는 평가를 받았을까. 나처럼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속으로 기쁨을 삼키며 가족들에게 한턱 쏠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유달리 조용한 사무실에서 팀원들은 칸막이 도시락에 담긴 반찬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각자의 알파벳을 수용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사무실 서랍에 있는 인쇄물을 모두 꺼내 파쇄하고 싶어졌다. 한 단어 한 단어 ‘워딩’을 고심하며 썼던 보고서, 마지막까지 숫자가 틀리지 않았는지 보려고 몇 번씩 인쇄해서 점검했던 엑셀 파일, 오해 없는 문장을 쓰려고 끙끙거리며 고쳤던 공문 메일 등등. 지난 일 년의 내 노력들이 드륵드륵 갈려나갔다.


말끔해진 서랍장을 보니 개운하면서도 허무했다. 눈앞에 둥실둥실 떠 다니는 알파벳은 과연 그간의 내 노력을 알고 있을까? 이렇게 메일을 고치고 보고서를 수정할 시간에 그냥 더 ‘나댔어야’ 했을까? 일을 하나 더 할 시간에 하나 한 걸 두 개 한 것처럼 포장하는 데에 시간을 들였다면 내가 받은 알파벳은 달라졌을까?







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시험은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에 나온 뒤에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시험을 치지 않을 뿐이지 평가권을 가진 사람에 의해 줄 세워지고 점수 매겨지는 일은 계속된다. 우리가 앉아야 할 의자는 늘 우리의 수보다 적어서, 누군가는 의자에 앉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함께 평가받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또는 평가자에 따라 나의 평가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평가는 단편적이어서 개인의 다양한 상황과 그 속의 노력, 성과를 다 반영해 내지 못한다. 또한 대부분의 평가는 일방적이어서 평가를 받는 사람의 이의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단호한 숫자와 등급 앞에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평가마저도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평가 결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 과정에서 즐거웠는지,

함께 하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냈는지,

내가 그 전보다 성장했는지,

전에 어려워했던 걸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전에는 하루 종일 헤맸을 일을 이제는 반나절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면, 전에는 세 번 고민했을 일을 두 번 고민 후에 결론내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평가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 큰 성장일 것이다.


‘직장인이 때에 맞는 승진이랑 봉급 빼면 뭐가 남냐?’

드라마 <미생>에 나온 뼈아픈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일까. 승진과 봉급이 결국 남들이 나에게 주는 평가에 달려 있고, 그 평가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 평가자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라면 그 평가에 내가 받는 돈이 좌우될지언정 내 마음이 다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운이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살피고 역량을 크게 키울 일이다.







싱숭생숭했던 그날, 설상가상으로 퇴근 무렵부터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나선다고 나섰는데도 기록적인 폭설은 도로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말았다. 정지해 버린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빠른 귀가를 포기한 채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다 휴대폰 속 스크랩함을 열었다.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문구들을 모아 놓은 스크랩함에서 김애란 작가의 인터뷰를 찾았다.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성취보다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김 작가는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의 성취보다는 어려운 시기에 무엇을 지키고 잃어버리지 않았는지에 더 눈이 간다.”며 “나 역시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품위나 호기심, 유머 같은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면서 살고 싶다. 이러한 것들은 성취만큼 드러나지 않더라도 나에게 더욱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김애란, ‘19년 7월 중앙일보 인터뷰 중에서


나는 내가 받은 등급이 아니라 내가 작년 한 해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작년은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겹쳐 마음과 몸이 상했던 시기였다. 잠시 휴가를 내고 마음을 추스르다 다시 회사에 나가 업무를 받았다. 회사는 이전과 똑같이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나는 솔직히 그냥 못하겠다고 손들고 도망가고 싶었다. 다친 마음과 몸이 계속 ‘나는 못해’, ‘나는 못해’를 외쳤다. 나는 어떤 날은 초콜릿으로, 어떤 날은 달달한 커피로 나를 매일매일 달래어 회사를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집에 가자. 응, 잘했다.

오늘은 어제 한 거에서 여기만 더 해 보자. 응, 잘했다.

괜찮아, 다시 천천히 해 보자. 오늘도 잘했다.


그렇게 몇 주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전처럼 삐그덕 대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회사일이 나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남들이 나에게 물어볼 수 있는 업무 영역도 생겼고 위축된 마음에 다시 자신감이 붙었다. 일을 잘하면 더 일상에 단단히 발 붙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최종적으로 남에게 잘했단 도장은 받지 못했어도 그건 성장의 시간이었다. 성취는 숫자와 등급으로 드러나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것이지만 성장은 나 자신이 가장 먼저 아는 것이니까. 혼자 조용히 허리를 곧게 펴 앉을 때,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내 앉은 키가 커졌다는 걸 아는 그 느낌처럼.


버스 창밖의 눈은 이제 바람에 날려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직장인이 숫자랑 등급 빼면 뭐가 남냐, 라는 말은 여전히 아프게 귓가를 맴돈다. 그래, 영원히 시스템에 남는 것은 이  알파벳일 것이고 그게 내가 받을 숫자와 등급을 만들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떤 태도로 주어진 상황에 임했는지, 어떤 가치를 지키려 했는지, 그 시간들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차가운 버스 창문에 이마를 대고 점점 무겁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내가 작년에 단련한 마음의 근육과 일의 근육에 대해 생각했다. 결코 알파벳 따위는 알지 못할 나의 시간들에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모두 내가 먼저 알아주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헤아리는 짧은 순간 동안은 이 눈길을 뚫고 언제 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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