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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r 27. 2017

휴직하는 날

봄에 길 떠나는 마음으로


드디어 마지막 날이었다.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들을 오전 중에 다 마치고, 오후부터는 인수인계 관련 메일을 보냈다. 오전까지 열심히 업무 요청 메일을 보내다, 오후부터는 ‘그런데 제가 이제 휴직을 하게 되어서요!’라고 선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지막 며칠은 환송회로 긴 밤을 보낸 터에 회사에서도 계속 술에 취해 있는 것만 같았다. 내 피의 반은 맥주고 반은 와인인 듯 복도를 거니는 내내 속이 꿀렁거렸다. 같이 일하던 부장님이 내가 휴직한다니 아쉽다고, 그동안 정말 잘해 주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며 살짝 눈물이 나려 했던 것도 분명 숙취 탓이었을 것이다. 같이 일했던 사수가 같이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00가 잘 서포트해줘서 덕분에 정말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고 했을 때 목이 메어왔던 것도 분명 숙취 때문일 것이다.


떠날 생각을 하고 가진 술자리는 정말 즐거웠다. 이제 더 이상 여기 소속이 아닌 나에게 사람들은 사실은 나도 떠나고 싶었노라고, 지금도 떠남을 꿈꾼다고 털어놓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더 이상 과장, 차장이 아니라 아직 젊고 꿈 많은 30대 후반의 오빠와 40대 초반의 언니로 보였다. 회사가 아니라 어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더라면 신나게 인생 이야기를 나눴을 사람들이다. 업무로 엮이는 바람에 서로 늘 가면을 쓰고 살았을 뿐이다. 만약 계속 회사를 다녔더라면 사적인 시간을 굳이 공유하지 않았을 사람들과도 이제 회사 밖에서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돈을 잃고 사람을 얻은 것일까? 비록 그 약속들이 빈말에 그치더라도, 지금의 느낌만으로도 좋을 것 같다.


자리를 비우고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햇살이 가득한 시간에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평범한 오후의 거리가 마치 처음 접한 것처럼 낯설다. 신학기의 기분이다. 모든 것이 낯선 새내기가 된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나는 10년 전 봄, 대학의 교실로 돌아가 영시의 한 소절을 떠올렸다.


항상 구름 같은 선한 미소를 지으셨던 교수님께서, 유일하게 강제성을 갖고 내어 주신 숙제. 중세 영문학 작품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의 첫 소절 General prologue를 암송할 수 있도록 외우라는 것이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봄이 만개한 어느 4월에 여러 순례자들이 모여 성인의 무덤이 있는 캔터베리 성지로 떠나면서 시작된다. 창 밖으로 벚꽃이 흐드러진 4월에, 학생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중세 영시를 노래하듯이 읊던 장면. 그 낭만적인 숙제 검사 덕에 나는 아직도 캔터베리 이야기 첫 소절을 입으로 기억한다.


Whan that April, with his shoures soote

4월의 감미로운 빗줄기가

The droghte of March hath perced to the roote,

3월의 건조함을 속속들이 꿰뚫고

And bathed every veyne is swich licour,

모든 줄기가 그 생명력의 물기에 흥건히 적시어지고

Of which vertu engendred is the flour;

그리하여 꽃들이 피어나고,

Whan Zephyrus eek with his sweete breerth

서풍은 그의 달콤한 입김으로

Inspired hath in every holt and heeth

들녘과 작은 숲의 연한 가지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The tendre croppes, and the youge sonne

아직 이른 태양은

Hathin the Ram his halfe cours yronne,

아직 그의 여정의 반을 지났을 뿐이며

And smale foweles maken melodye

자연이 그들의 가슴에 춘심(春心)을 자극하여          

That slepen al the nyght with open eye-

뜬눈으로 온 밤을 지새운 작은 새들은

So priketh hem Nature in hir corages;

애욕스런 노랫소리를 쉴 새 없이 지저귄다

Thanne longen folk to goon on pilgrimages

이때 사람들은 순례를 염원하게 된다


Pilgramages, 란 말에 새가슴처럼 콩닥거리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 중세의 순례자들이 봄바람에 설레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멀고 험한 순례길을 자원해 나선 것처럼, 나 역시 원래 있던 곳을 잠시 떠나 나 자신만의 순례를 시작하려 한다. 성인의 무덤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왜 휴직하냐는 질문에 늘 얼버무리곤 했는데, 어쩌면 나를 휴직으로 이끈 힘은 바로 그 춘심(春心)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4월이 오고 있다.

순례를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설명 및 번역 출처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996895&cid=41773&categoryId=44395


General Prologue 중세 영어 버전 암송

https://www.youtube.com/watch?v=ahuT-JwxIa8


배경 그림: 봄의 도래 The Arrival of Spring, 2011 (데이비드 호크니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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