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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r 28. 2017

휴직자의 리듬에 적응하기

휴직 첫날


휴직 첫날은 마치 하루짜리 평일 연차를 쓰듯 바쁘게 보냈다. 보통 출근하는 사람이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서, 병원 두 군데를 돌며 진찰을 받고 보험 청구할 영수증을 받아 왔다. 운동을 등록하고, 중고서점에 들러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샀다. 회사를 다니면서 단문 위주의 글에 익숙해져 긴 호흡의 소설들을 읽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휴직을 하면 꼭 장편 고전소설을 읽겠노라 다짐했던 차였다. 책을 들고 카페로 갔다. 유효기간이 다 되어 가는 커피 쿠폰을 써서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평일 오후의 카페에도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알았다. 집에 돌아와 밀린 집안일들을 해치우고 나니 남들의 퇴근시간이다.


앞으로 계속 회사를 쉴 것이라는 것이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다. 계속 남들이 일하는 하루 8시간은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잡게 된다. 김지운 감독이 백수 시절을 회고하며 '백수도 1,2개월이 제일 힘들지 2년 정도 지나면 리듬이 생긴다'고 말했듯이, 나도 한두 달은 지나 봐야 이 리듬에 적응이 될 것 같다. 1년을 쉬고 복직한 선배도, 처음 세 달은 시간이 정말 안 가는데 그 뒤는 순식간이더라고 했다.


독립출판물 서점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홍대, 상수 쪽에 있는 서점들을 보며 한번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나는 언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휴직자의 신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동안 습관처럼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며 지냈다. 이제는 벚꽃 피면 진해 군항제도 갈 수 있고 가을바람 불면 부산국제영화제도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시간이 없어 못한다는 변명 따윈 이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뭐든지 할 수 있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이 백지 위에 떠오른다. 그동안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며 몇 년을 묵혀 놓은 일들을 하나씩 해 보려 한다.





사실 나는 끝까지 백수로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물론 돈이 없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서른네 살까지 백수생활을 했다. 사실 그게 1, 2개월이 제일 힘들지 2년 정도 지나면 리듬이 생긴다. 백수 리듬을 타게 되면 사람이 참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성취욕 그런 게 없으니까 뭐 특별히 급할 것도 화낼 것도 없다. 일생에서 직업적으로 제일 길게 한 것이 백수인데, 아마 감독이란 직업도 영화를 안 찍을 때는 도로 백수일 수 있어서 선택한 것 같다. 백수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뒷마무리가 정해지는 것 같다. 이건 나중에 돈으로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주옥같은 시간이니까.

나는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편이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빨리 쓸 수 있는 건 아마도 다년간 쌓아온 '백수 공력'이 아닌가 싶다. 백수 때 많이 보고 잘 놀고 10년간 받아들이기만 하고 한 번도 쏟지 않았던 어떤 것이 무진장한 창작욕구가 되었고, 지금 영화감독이 되어 한번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든다. 이런 백수기가 나에겐 감독이 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백수 시절, 집안에서 걱정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나는 걱정이고 뭐고 그냥 밀고 나가는 편이었다. 물론 부모님 하시는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는데 늘 말들보다는 그 말들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냥 쿨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서른이 넘었는데 다 큰 아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머님이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동회 같은 데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그러시면 "아... 예"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다가 시나리오가 당선되어서 "엄마, 나 시나리오 당선됐어"하니까 슬픈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시더니 "이제 거짓말까지 하냐" 그러셨다.

- 김지운의 <숏컷>,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배경 그림: The Catalan Landscape (The Hunter), 호안 미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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