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후우울증 이야기
내가 집에서 혼자 아이를 보면서, 아이만 보면서 우울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는 임신 이후로 늘 든 고민이었다.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육아휴직을 신청하면서도 산후우울증을 늘 경계해 왔다. 가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테스트를 해 보고, 의사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서 말이다. 정문으로 우울이 들어오면 내가 너 이리 올 줄 알았다며 발로 시원하게 걷어차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기와 함께 하는 긴 겨울, 나도 모르게 뒷문으로 들어온 우울은 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
아기 백일이 지나고 이제 육아가 조금 손에 익을 무렵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행여나 뭐가 잘못될까 긴장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지나고, 다들 "그래도 전보다 낫지?" 하고 물을 때쯤이었다. 아기는 여전히 밤마다 두세 시간에 한 번은 깨어 수유를 해야 했다. 모유수유 중이었고 남편은 출근을 해야 했기에 대부분의 밤 육아를 내가 맡았다. 그러니 늘 피곤했다. 날이 추워 유모차에 방풍 커버를 씌워 산책을 나가려 하면 아기는 마치 관짝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지러지게 울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 수를 보면 백화점이나 카페 같은 실내공간을 가는 것도 망설여졌다. 아기와 양육자 모두에게 힘든, 코로나 시대의 겨울이었다.
아직 상호작용이 되지 않는 어린 아기를 한없이 돌보기만 하는 관계는 끝없는 인내를 필요로 했다. 아기에게 다 주고 나니 나는 꼭 멸치국물 우려낸 멸치처럼 생기가 없어졌다. 나는 어느새 혼자서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찍고 있었다. 애 재우고 싱크대 옆에 서서 대충 국에 밥 말아먹는 여자, 햇빛 드는 거실에서 멍하니 아기 빨래를 개면서 자기가 우울한지도 모르는 여자 역할을 자처했다. 아기보다 나를 먼저 챙기는 가볍고 쿨한 엄마가 되자는 나의 다짐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점점 끼니 챙겨 먹기가 귀찮아졌다. 누가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물으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잘 챙겨 먹으면 뭐 해, 그래 봤자 애나 보겠지." 나를 충전하고 주유해 봤자 결국 그 충전된 에너지는 콸콸 흘러 아기에게 들어갈 뿐이었다. 모유수유를 하고 있었으니 실제로도 그랬다. 아기 낮잠 시간을 틈타 도둑처럼 살금살금 먹는 식사는 뭘 먹어도 맛이 없었다. 나는 점점 대충 먹고 잘 씻지 않고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찾아 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날 새벽 아이 수유를 한 뒤 아기를 트림시켜 재우고, 남편의 태평하게 코 고는 소리를 듣다 못 견뎌 거실에 나왔을 때였다. 창문 밖으로 쿠팡 택배 상하차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그냥 여기서 떨어지고 싶다, 그럼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가 없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창문에 가상의 나를 세워놓고 몇 번이고 떨어뜨리는 상상을 하는 나를 보며 나는 내가 우울하다는 것,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란 것을 알았다.
내가 인정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아기를 도저히 나 혼자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낳았는데 그걸 내가 혼자 돌보는 걸 힘겨워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잠시라도 쉬려면 누군가가 애를 봐줘야 했는데,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잠을 청해 봤자 좌불안석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아기를 맡기면 필연적으로 아기를 봐주는 사람과 부대끼게 되었다. 누구도 나만큼, 내가 만족하는 방식으로 애를 볼 수는 없었다. 특히 친정이나 시댁의 어르신들에게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불편함이 쌓여갔다.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에서 듣는 이런저런 말씀들은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처로, 간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점점 그냥 내가 혼자 보는 게 낫다고 고생길을 자처하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수면부족과 피로였다. 세네 시간을 이어서 푹 자본 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몇 달이 지나며 피로가 누적되었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아기를 봐주며 너는 들어가서 눈 좀 붙여라,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와라, 해서 외출을 하더라도 늘 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피곤했다. 카페에서 디카페인 커피를 시키고 앉아서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를 견디며 멍하니 있다 돌아올 뿐이었다. 아침에 아기가 깨어서 나를 보며 웃으면 너무나 예쁜데 내 몸은 천근만근 피곤했다. 뇌가 뭉근히 녹는 것 같은 피로를 견디고 아기에게 미소를 짓다 보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마치 염전에 들어가 누운 사람처럼 온몸에 짠내가 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아이를 예뻐하는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힘이 들기만 하는 것일까.
모두 즐겁기만 한 것 같은데 왜 나의 인생만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아이를 돌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힘들었다. 나를 나답게 하는 모든 관계망이 끊기고 만나는 사람은 그저 친정, 시댁, 남편뿐인 나날은 사람을 시들게 했다. 나는 진심으로 얼른 아기를 어린이집에 한 시간이라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애를 맡기고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침마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나누는 짧은 대화, 같은 반 애엄마와 나누는 대화가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 같아서였다. 어린이집 입소 전화가 왔을 때 양가 어른들은 다들 아기가 너무 어리지 않냐고 했고, 남의 손에 어떻게 맡기냐 했고, 코로나가 걱정된다 했고, 우리가 자주 봐주겠다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입소를 미루겠다고 전화를 한 날 밤, 나는 방에서 혼자 베개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가정보육은 아이에게 좋다. 하지만 나에게도 좋을까.
모유수유는 아이에게 좋다. 하지만 나에게도 좋을까.
엄마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게 아이에게 좋다. 하지만 나에게도 정말 좋을까.
모두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사랑하는 아이에게 좋을 걸 주려면 나는 계속 깎여나가야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우울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겨울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나 혼자 하려 했고, 다 잘하려 했다. 나의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남편도 시댁도 친정도 적극적으로 육아를 도와주려 했지만 이 컴컴한 동굴에서 나를 꺼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세상에 이 아이의 엄마가 한 명 더 있었으면, 그래서 그 여자랑 이 모든 걸 같이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원래 산후 6개월은 병리학적으로 애도 기간으로 본대."
정신과 수련 중인 친구는 내 하소연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출산 후 6개월은 보통 아기에게 많은 것이 집중되기 마련이고, 산모는 양육에 대한 부담감과 기존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하는 박탈감으로 우울이 찾아오기 쉽다 했다. 그러니 가족의 죽음이나 이혼 이후처럼 어쩔 수 없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 했다. 친구가 말한 "애도"라는 단어가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 애도는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출산 이전의 나에 대한 애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우울은 이상하고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 충분히 애도하고, 다시 태어나자.
휴직에 들어가기 전, 휴직하고 아기만 보면 우울해질까 봐 걱정된다고 털어놓자 한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산후우울증 오면 약을 먹고 돈을 써서 사람을 써요."
마치 비가 오면 우산 쓰면 되죠, 처럼 해맑고 명쾌한 어투였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는 농담처럼 듣고 넘겼던 그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병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