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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Oct 27. 2022

좋은 엄마는 편안한 엄마

나의 산후우울증 이야기 2 

한 달의 대기를 기다려 마침내 만난 의사가 예상했던 진단과 처방을 내리자 나는 물었다. 


"상황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데 약만 먹는다고 좋아질 수 있을까요?"


의사는 말했다.


"그게 바로 우울의 징표예요. '이런다고 될까?' 하는 생각이요. 약을 먹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힘이 생기면 상황을 조금씩 개선시킬 힘을 낼 수 있어요."


나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약을 먹으면 모유수유는 중단해야 하나요?"


약을 먹으며 수유를 해도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수유를 끊기를 택한다 했다. 의사는 말했다. 


"모유수유를 하면서 힘들어하는 엄마보다는 약을 먹고 분유를 주더라도 편안한 엄마가 아이에게 더 좋은 엄마 아닐까요?"


반박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말이었다. 전문가의 권위에 약한 나는 의사 말을 듣기로 한다. 한 달 안에 단유를 하고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의사는 꼭 다시 보자고 말하며 덧붙였다. 


"엄마는 갑작스럽게 큰 변화를 겪어서 우울해질 수 있어요. 이건 엄마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아이가 생긴 건 정말 큰 변화이기 때문에 사실은 모두가 변해야 해요. 남편도, 시댁도, 친정도. 지금은 엄마가 대표로 힘든 거예요. 다음 예약 땐 남편분이랑 꼭 같이 와요."


"제가 아이를 보는 것 때문에 우울하다는 걸 인정하기가 힘들어요." 


"우울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에요. 우울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나의 어떤 부분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이걸 치료하면서 하나씩 살펴봐요. 그럼 이게 계기가 되어서 더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럼 나중에 생각하면 아 그때 우울하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4주 뒤로 예약을 잡고 나가면서도 나는 믿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다. 아기가 조금만 더 자라면 괜찮아질 거고 나는 혼자서 이겨낼 수 있다.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든 것 아닌가. 약이라니, 무슨. 





단유를 핑계로 벌어놓은 4주의 시간 동안 나는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아이를 두고 외출을 길게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전화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좋은 상담사를 만났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에 나는 바로 안심할 수 있었다. 다들 아기가 잘 크는지만 묻지 엄마가 잘 지내는지는 묻지 않는데, 상담에선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상담사는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좋은 엄마'는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엄마는 교사였지만 당시의 학교는 육아휴직은커녕 백일의 산후조리도 보장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낳고 두 달도 되지 않아 일터로 복귀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일하는 엄마가 드물던 시대였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자랐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 엄마에 대한 정서적 결핍감이 있었다. 아이를 갖는 그 순간부터 떠오른 것이 바로, 내 자식에게 이런 결핍을 물려주기 싫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나는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회사에 가는 걸 더 행복해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같은 "워킹맘"의 운명에 처하는 걸 조금이라도 미뤄보고 싶었다. 일 년의 육아휴직은 나의 엄마가 맞닥뜨렸던 상황 -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나가는 것, 퇴근 후 지쳐서 아이를 보고 웃어줄 수 없는 것, 나보다 시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 을 최대한 유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엄마는 못했다던 모유수유도, 만들어 먹이는 이유식도, 기관에 보내지 않고 가능한 가정 보육하는 것도, 내 아이는 생후 일 년이라도 엄마의 손길을 최대한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상담사는 말했다. 


"어렸을 때 자기가 받고 싶었던 걸 아이에게 그대로 주고 싶었군요."


나는 누워 있는 아이를 보며 삼십몇년 전의 나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받고 싶어 했던 것, 그것이 모유수유와 수제 이유식이었는진 알 수 없지만, 이 아이에겐 다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다. 


상담사가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정말로 받고 싶었던 건 뭐였어요?"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상담사는 넉넉하게 기다려주었다. 

대답은 나도 모르게 나왔다. 눈물도 함께였다. 


"엄마가 나를 보고 웃어주는 거요."





엄마는 어렸을 때 하굣길에 친구들과 군것질을 하는 게 그렇게 부러웠다 했다. 농사를 짓는 외가댁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딸들에게 돌아갈 지원은 더더욱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대학도 보내 주지 않으려는 걸 엄마가 무쇠 고집으로 설득을 해서 겨우 교대에 진학을 했다. 


엄마는 자신이 부러워했던 것들을 자식에게 주기 위해 평생을 성실히 일했다.  남의 군것질을 샘내지 않아도 되는 용돈. 풍부한 교육의 기회. 여자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지원해주는 부모. 엄마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세일러문 만화책이며 아르센 뤼팽 추리소설 전집을 "이런 것도 책이냐?" 고 핀잔을 주면서도 꼬박꼬박 사 주었다. "엄마가 너희한테 이런 거 사주려고 돈 버는 거야."  그게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체력과 역량 이상으로 늘 약간은 무리해야 했다. 퇴근해 돌아온 엄마는 대부분 지쳤고 피곤했기에 우리에게 살뜰하고 다정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일하는 엄마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나는 하교하고 집에 오면 간식을 만들어 내어 주는 엄마, 어렸을 때부터 써 온 "육아일기"가 있는 엄마, 딸과 긴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나 역시 내가 받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주기 위해 애썼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성실함으로, 엄마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무리를 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엄마표 OOO"와 정서적 애착을 주는 것에 집착할수록, 아이를 보고 웃어줄 수 있는 여유는 없어졌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웃어주고 예뻐해 줄 수 있는 엄마였는데. 


"그럼 '좋은 엄마'는 편안한 엄마, 행복한 엄마네요.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한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봐요."


상담 한 회기가 끝날 때마다 나는 뜨거운 차를 잔뜩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음속에 따뜻한 찻물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행복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 나는 진심으로 행복을 목표로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사실 행복한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칭찬과 주목을 받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의 행복은 희생되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아이를 보고 더 많이 웃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자고 다짐하니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이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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