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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Oct 28. 2022

화려한 조명 아래 뚝딱거리는 나

줌바가 가져다 준 '피스'

단유를 하고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2주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지쳐서 모나게 된 마음이 좀 둥글둥글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아기를 돌보는 방식에 꼭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새벽에 깨었을 때 잠을 좀 더 잘 자게 되었다. 밥맛은 여전히 없었지만 나를 위해 배달 음식을 시켜볼 마음이 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즈음부터 아기가 밤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 두세시간에 한번씩 깨던 아이가 갑자기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을 이어 자게 되었다. 단유를 하고 분유와 이유식을 잘 먹게 되어 포만감이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이전보다 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기가 "통잠"을 자 주는 건 육아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였다. 나도 밤에 잠을 푹 자게 되어 머리가 맑아졌고 세상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여가 시간과 수면 시간이 확보가 되자 운동을 시작할 여유가 생겼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운동복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것, 수업에 가서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리프레시가 되었다. 


줌바는 그렇게 새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정적인 운동을 선호하는 나는 평생 줌바 같은 건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살이 잘 빠진다는 말에 혹해 저녁 줌바 등록을 했지만 개강 전에 환불을 할까 망설였는데, 센터에서 보낸 안내 문자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코로나 시대에 저희 휘트니스 센터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여 회원님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이용할 수 있게 힘쓰고 있습니다. 000 휘트니스는 회원님의 일상이 지속되길 응원합니다. 피스!" 


피스! 라니... 이 촌스러운 듯 유쾌하며 힙한 감성은 무엇인가. 이 센터는 공지문자에 꼬박꼬박 피스! 를 붙였다. 힙한 것에 약한 나는 이 센터가 궁금해졌다. 왠지 여기서 줌바를 배우면 '피스!'를 얻을 수 있을 같았다.  





첫 수업을 갔다. 거기에는 화려한 조명이 있었고, 계속해서 "미 꼬라존(Mi corazon, my heart)"을 흥얼거리는 열정의 라틴 팝이 있었고, 신이 나서 못 견디겠는 표정을 한 열정의 강사가 있었고, 일사분란하게 강사의 지시에 따라 춤을 추는 노련한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리고 출산 후 제대로 움직여본 적 없는 나약한 관절로 박자도 못 맞추고 고장난 기계처럼 뚝딱거리는 내가 있었다. 나는 이 수업에 어울리지 않는 깍두기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계속 교실의 거울을 보며 내가 얼마나 못하는지를 봤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로 고개를 돌려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지를 봤다. 같은 춤을 춰도 잘 추는 사람은 춤선이 아예 달랐다. 잘 하는 사람, 내가 지금 뭘 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나는 한 언니를 점찍어놓고 마음 속으로 "이 수업 센터"라 부르며 그녀의 춤을 아이돌 직캠을 보듯이 열심히 감상했다. 


관찰 끝에 알게 된 것은 잘하는 사람도 항상 모든 동작을 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센터”도 뒷모습을 보면 잔동작을 틀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거울에 비친 앞모습으론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음악을 듣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사의 동작을 따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춤"을 즐기면서 췄다. 그래서 더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항상 운동을 가면 열심히 하고 잘 하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헬스장에 가서는 점점 더 무거운 것을 들고 싶어했고 요가 수업을 가서도 어떻게든 조금 더 뻗어보려, 숙여보려 애를 썼다. 운동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줌바에서는 잘하고 못하고가 크게 의미가 없어보였다. 잘하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나는 이 수업에서 가장 뚝딱이는 사람이 되자 생각하니 점점 줌바가 좋아졌다. 





수업을 가면 갈수록 나는 점점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잘한다/못한다, 쉽다/어렵다가 아니라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신이 났다. 어느새 나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에 맞춰 마치 관광버스에서 트로트를 열창하는 할머니들처럼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뚝딱거렸지만 전처럼 신경쓰이지 않았다. 


상담사에게 요즘 줌바가 너무 재미있다고, 잘할 생각 없이 그냥 하니까 너무 신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말했다.


“너무 잘하셨어요. 줌바가 지금 꼭 필요한 운동이었네요. 그럼 다른 일들도 줌바하듯이 해 보세요. 육아도, 글쓰기도, 다른 일도요.”


낮잠 세 번, 이유식 두 번, 같은 하루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듯이 육아하는 게 아니라 아이와 즐거운 오늘을 보내는 것.

머리싸매고 괴로워하며 쓴 글에 '좋아요'가 몇 개가 찍히는지 연연하기보다는, 글을 쓰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

매사를 잘하려고 불필요하게 긴장하고 억지로 애쓰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하는 것. 


잘할 필요는 애초에 없었다. 잘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잔동작을 틀리는 건 어차피 본인 외에는 아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의 줌바 수업에서 나는 잘하지 않아도 되는 연습을 했다.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고, 남도 나도 평가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 그 시간을 보내는 연습. 그렇게 땀에 몸이 흠뻑 젖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오늘 수업에서 들은 '미 꼬라존'을 흥얼거렸다. 씻고 나와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를 보면 세상에 두려워할 일도 부러워할 일도 없었다. 잠든 아이의 배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그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면 고속 승진하여 주재원 후보가 된 동기도, 매주 임장을 다니는 부동산 도사 친구의 재산축적도, 인플루언서의 힙한 인스타그램 피드도 부럽지 않았다. 땀과 음악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평화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다음달 수업을 재등록했다. 센터에서는 줌바 수업이 인기가 많아 대기자가 줄을 섰다며, 입금 기간을 놓치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주었다. 문자의 마지막은 여전히 '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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