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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Oct 28. 2022

내 몸이 다시 내 몸이 되었다

괜찮고 또 괜찮지 않았던, 모유수유

힙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나는 내가 이렇게 오래 모유를 먹이고 있을지 몰랐다.


임신 출산 육아를 하며 알게 된 것은 인간은 정신이 아닌 육체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어쩔 수 없는 호르몬의 노예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종족 번식을 위해 세팅된 이 호르몬은 모체에게 계속해서 말한다.


"젖을! 먹여라! 계속!"


아이를 낳고 며칠이 지나자 가슴이 돌처럼 딱딱해지며 젖이 돌기 시작했다. 수유나 유축을 하지 않고 잠을 택하면 그다음 날 코로나보다 더 아픈 젖몸살을 앓아야 했다. 고열, 가슴이 불타는 것 같은 답답함, 팔도 들 수 없는 근육통. 젖몸살의 해결법은 그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아픈 엄마와 배고픈 아기는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가 된다.


옛날 왕족과 귀족들은 직접 수유를 하지 않고 유모를 뒀다. 사실 엄마에게 모유수유는 육체적으로 지치고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르몬은 수유를 하는 동안 이것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착각하도록 옥시토신을 분비한다.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내 몸 힘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 이 아이에게는 오직 나만 있으면 된다는 진한 행복감. 다른 사람은 대체해 줄 수 없는 육체적 애착. 나 역시도 그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불편을 감수하고 모유수유를 이어왔다.


그렇게 몇 달 수유에 익숙해지고 나면 수유를 끊는 것도 일이 된다. 단유를 하기 위해 수유 양을 줄이면 옥시토신이 감소하며 엄마는 우울해진다. 오죽하면 "단유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단유를 진행하는 동안 나도 나쁜 엄마가 된 것 같고 아이와의 친밀하고 유일무이한 관계를 박탈당한 것 같은 우울감이 들었다. 심지어 약을 권한 의사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생길 정도로 비이성적인 집착까지 들었다. 이건 호르몬의 농간임이 틀림없었다.


사실 나는 모유수유를 하는데에 신체적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 아이의 곁을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것, 젖이 나오는 한 우리는 한 세트라는 것, 만약 내가 이 아이를 오래 떠나게 되면 내 가슴에는 불이 날 것이라는 것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외출을 하면 세네 시간이면 가슴이 딱딱해지고 아팠다. 한나절 아이를 맡기고 어디 호캉스라도 다녀오려고 해도 유축기와 깔때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했다. 피부과도 치과 진료도 약을 쓰기 힘들어 한계가 있었다.


단유를 하면 더 자유로워질 것이 분명했는데도, 밤이 되어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면 젖을 물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내일 새벽이 되면 다시 수유할 거야 하고 다짐했다가, 환한 대낮에 유모차를 밀며 산책을 하고 있자면 다시 머리가 맑아지며 그래, 단유하고 나는 이제 내 몸으로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가 다시 밤이 되면 또다시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더 이상 젖을 못 먹이는 것이 섭섭하고 서운해 눈물이 났다. 생리 전 증후군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은 강력한 무드 스윙이었다.






그 미안함을 끊어준 것은 어느 매우 졸린 날 아침이었다. 새벽에 아이가 여러 번 깬 탓에 나는 아직도 눈이 막 감기고 졸려 죽겠는데, 아이는 나에게 매달려 나를 타고 오르며 자신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하소연했다.


"엄마 졸려... 더 자면 안될까? 너무 피곤하다..."


그때 깨달았다. 앞으로 이런 아침이 우리에게 무수히 많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매 순간 항상 아이에게 백 프로를 할 수는 없다는 것도. 나도 사람이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수많은 아침이 남아 있으니 오늘 좀 못했더라도 내일 또 잘해줄 수 있다.


나는 지나간 것, 닫힌 문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티브이에서 해주는 만화영화가 끝나면 오래 그 만화를 그리워했고, 새로 시작한 만화는 괜한 반감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모유수유의 문은 닫혔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채워나갈 수 있는 시간이.


아이는 계속 자란다. 벌써 작아져 못 입게 된 옷들이 한 짐이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고 섭섭해할 시간에 아이와 어떻게 즐겁게 시간을 보낼지를 생각하기로 했다. 모유수유 말고도 아이와 애착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쳤다.





나는 서서히 분유 양을 늘리고 모유 양을 줄였고, 한 달을 좀 넘겨 완전히 단유를 했다. 아이가 분유에 잘 적응해 준 덕분이었다. 약 7개월을 수유했는데도 단유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내 몸에서 젖이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기묘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몸이 쾌적하고 산뜻했다. 내 몸이 비로소 다시 내 몸이 된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단유를 하자 내가 세운 "'좋은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들을 내려놓는 일이 훨씬 쉬워진 것이다. 마치 도미노처럼. 나는 전보다 육아책을 덜 찾아보게 되었고, 이유식을 사 먹이기 시작했고, 보육기관에 한 시간씩 아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모유수유를 끊는 것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엄마"의 기준에 내 나름의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모유를 먹이고, 재료를 직접 다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엄마,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그 마의 "3년" 동안 아이 옆에 꼭 붙어 애착을 형성해주는 엄마 말이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나를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에서 타협한다.


좋은 엄마는 편안한 엄마다.


그동안 수고해 준 대여 유축기를 반납하기 전에 유축기 깔때기와 여러 부품들을 정리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잠못이루는 밤낮을 함께한 오랜 동무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안녕, 안녕, 내 몸에서 젖이 나왔던 시절아. 내 몸에서 나온 생명을 먹이고 키우느라 수고한 내 몸아. 그동안 애썼다. 너의 수고는 너 자신만이 알겠지. 수유를 해도, 또 하지 않아도 너는 항상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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