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는 시간먹는 귀신이 산다
엄마표 이유식의 환상과 실체
분유만 먹던 아기가 이유식을 시작한 순간부터 인생이 두배로 바빠졌다. 이유식은 잘 먹는 아이가 드물다고, 먹는 게 반 뱉는 게 반이라 들었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먹는 걸 좋아했다. 주면 주는 대로 잘 먹으니 점점 더 맛있는 걸 해주고 싶어졌다. 아기새처럼 숟가락을 향해 입을 벌리는 모습, 쌀알처럼 돋아난 아랫니 두 개로 오물오물 씹으며 환하게 웃는 아기를 보면 세상의 맛난 것이라면 다 맛보게 해주고 싶어졌다. 이유식 만들기는 육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되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손빨래다.)
평소엔 샤브샤브 먹을 때나 겨우 먹던 야채들- 청경채, 비타민, 근대 등을 유기농 매장에서 사들여 이유식을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아기 이유식은 죽 형태라 아기 밥을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요리를 좋아하고 손이 빠른 편이라 생각했는데도 일주일치 이유식을 만들면 두세 시간 순식간에 흘렀다.
아기 먹을 것이니 농약이 제거되게 한참을 물에 담가 씻고, 잘게 썰고 다지고, 끓이고 갈고, 냄비와 식기를 설거지하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더 큰 문제는 청경채 한 봉지를 사면 이유식에 들어가는 야채는 많아야 한 줌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냉장고로 들어간 비싼 유기농 야채들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나를 노려보며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 야채들을 어른이 먹을 만한 무엇으로 둔갑시키는 데는 이유식 만들기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렸다.
아기 낮잠을 재우고 잠깐 옆에 누우면 눈앞에 냉장고에 남은 야채들이 그려지면서 '아 그거랑 그거랑 같이 뭘 해 먹어야겠다'가 그려졌다. 그럼 지금 당장 그걸 만들라고, 부엌에 사는 부엌신의 부름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잠시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야채칸의 문을 열게 되었다.
대략 이런 흐름이다.
아기 이유식에 넣고 남은 시금치를 어떻게 할까. 아, 어른이 먹게 잡채에 넣자. 잡채용 당면을 꺼내 불리면서 잡채에 넣게 당근도 꺼내 썰게 된다. 당근을 꺼낸 김에 이유식용 당근도 같이 다져놓는다. 다진 당근이 조금 남아 계란찜에 넣기로 한다. 계란을 꺼낸 김에 아기가 먹을 계란도 같이 삶는다. 그럼 하는 김에 어른 계란도 같이 삶아 감자 샐러드에 넣어 먹자. 감자를 찌는 김에 아기 이유식용 감자도 같이 쪄서 이유식 큐브를 만든다. 시들어가는 오이를 살짝 소금에 절여 감자 샐러드에 같이 넣자. 그럼 남은 오이로는 또 뭘 하나... 이런 식으로 남은 야채는 요리를 부르고, 그 요리는 또 다른 요리를 부르고, 그때마다 씻을 그릇이 생기고 싱크대의 물기를 정리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요리를 하게 되었다.
옷을 좋아하고 잘 입는 친구는 가끔 이 말을 했다.
“쇼핑하면 계속 쇼핑하게 된다? 옷 사면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 사고 싶고, 신발 사면 또 같이 들 가방 사고 싶고, 가방 사면 또 어울리는 스카프 사고 싶고, 스카프 사면 또 거기에 어울리는 옷 사고 싶어져. 그거 절대 못 끊어.”
부엌 귀신으로 살며 나는 그 말을 종종 떠올렸다. 쇼핑이 쇼핑을 부르듯이 요리는 요리를 부르고 살림은 살림을 부른다. 그러니 부엌을 맡고 있다는 조왕신은 몹시 깔끔하고 바지런한 성격일 것이다. 조왕신은 부엌살림을 맡고 있지만 요리하면서 아무리 주전부리를 주워 먹어도 살찔 틈이 없을 것이다.
내가 부엌신의 수제자가 된 덕에 냉장고에는 온갖 유기농 야채가 그득했고 아기는 매일 다른 죽을 먹었다. 남은 야채를 소진하기 위해 어른 밥을 만들다 보니 배달비가 줄어들어 남편이 감탄했다. 내가 만든 것으로 한 생명을 먹이고 키우는 것은 힘은 들어도 보람찼다. 아기의 허벅지가 탄탄해지고 키가 크고 다리 힘이 세지는 것을 보면 어떤 일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성취감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행복하고 늘상 피곤한 부엌 귀신으로 살았다. 나는 부지런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이게 재미있다, 나는 아기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가 또 나도 모르게 야채칸의 남은 야채들을 들여다보며 뭘 만들어 저 풀떼기들을 처리하지, 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바로 지금 그걸 만들어야 한다는 충동이 마치 술 마시고 싶은 욕구처럼 올라오는 순간, 나는 이 느낌이 아주 친숙하다는 걸 발견해 냈다.
그렇다. 이건 시험이나 과제를 앞두고 집안 청소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었다.
나는 살림에 몰입함으로써 뭔가를 미루고 있었다. 무엇을?
엄마인 나 말고 원래의 나를.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을.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의 첫 챕터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잡아채 이름 붙이고 하나씩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사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미루고 있는 것 아닐까?
24시간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한 번엔 결국 하나만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제는 알겠다. 부엌에는 분명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 산다. 나는 그 귀신을 피하기 위해 엉망인 부엌에서 애써 눈을 돌린다. 아기가 낮잠에 든 시간, 가스레인지 후드를 닦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냉장고를 열어 식은 밥을 꺼내다가 변색되어 가는 유기농 양배추를 보고 또 뭘 만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이건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다. 대신 워드 창을 연다. 주절주절 지금의 마음을 쓴다. 무엇이 되지 못할지라도 지금을 기록한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가 아니라, 주부가 아니라, 잠시 이전의 내가 된다.
백지상태의 워드는 묻는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 잘 살고 있니?
아기 말고 너 말이야.
그 질문에서 도망쳐 이유식 레시피를 검색하고 싶은 마음, 한살림 온라인 장보기를 누르고 싶은 마음을 지그시 눌러본다. 다음 주엔 시판 이유식을 주문하리라, 냉장고엔 어떤 푸성귀도 들이지 않고 다 만들어진 음식들로만 가득가득 채워놓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