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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Feb 18. 2018

다시 돌아온 자

다른 생각은 다른 삶을 만든다

복직하고 돌아와 처음 찾은 여자화장실 사물함에서 내 치약과 칫솔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휴직하는 날 말끔히 치우고 갔을 물건이다. 칫솔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제대로 뚜껑을 닫지 않은 치약은 입구가 말라 있었다. 혹시 누가 내 자리를 차지할까 싶어 야무지게 영역표시까지 해 둔 사물함을 보고 알았다. 아, 나는 돌아오고 싶었구나. 돌아올 생각이었구나. 


너무나 똑같은 업무와 조직과 사람 속에서 언제 휴직했었나 싶게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그럼 휴직은 무슨 의미가 있었나 묻게 될 때, 대담한 휴직 끝에 더 대담한 ‘선택’을 내렸어야 했나 후회가 될 때, 나는 그 칫솔과 치약을 생각한다. 순진하게도 아직 이 곳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치약과 칫솔을 둔 한 뼘 자리만큼의 애정일지라도. 그러니 돌아오는 것 까지가 나의 계획이었다고. ‘돌아온 탕자’가 익숙한 환경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또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꿈을 꾸게 될지 보고 싶었다고.


그만큼 쉬었으면 뭔가 변화와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가난한 마음이 '가성비'와 '본전'을 찾기 시작하면 쉽게 괴로워진다. 벌지 못했던 돈만큼, 낯선 나라를 헤매었던 날들만큼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바로 그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보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 멈춘 것인데.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휴직하고 들은 주역 수업을 떠올린다. 동양철학을 통해 배운 것은 무형의 변화가 유형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이다. 흔히 봄을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변화의 씨앗은 겨울에 잉태된다. 겨울은 그저 춥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눈 쌓인 가지 끝에서 봄에 필 꽃눈이 맺히고 꽁꽁 언 수면 밑에서 강물은 조용히 흐르며 봄을 기다린다. 변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하지만 적당한 계절을 만나면 보이는 것으로 물질화, 현실화된다. 다른 생각은 언젠가 다른 삶을 만든다.


그러니 조급해하기보단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성실하게 보낼 일이다. 그날그날 하루치의 일, 하루치의 삶, 하루치의 고민에 충실하다보면 또 다른 계절을 만날 수 있겠지. "봄바람은 차별없이 천지에 가득 불어오지만 살아있는 가지라야 눈을 뜬다"(최명희, <혼불>)는 말처럼 다만 깨어 있자고 다짐해 본다.







"무심한 세월이라고 어디 아무한테나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전에 제가 듣고 마음에 좋아서 접어둔 말이 있는데요, 봄바람은 차별없이 천지에 가득 불어오지만 살아있는 가지라야 눈을 든다, 고 안허든가요."

"좋은 말이로구나. 세상에 있는 삼라만상, 목숨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세월은 모두 다 그 품 속에 안고 키워주느니라. 들짐승, 산짐승, 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를 보아라. 아무도 안 멕여주지마는 저절로 저 혼자서 맹수도 되고 맹금도 되어 호랑이, 독수리 용맹을 떨치지 않더냐. 산속의 나무들도 마찬가지고 사람 또한 그러느니라......(중략) 허나 그것은 다 제가 타고난 목숨을 제 몸에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지. 껍데기만 살았다고 목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살어 있으면서도 죽은 것은 제가 저를 속이는 것이야. 살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죽어 버린 것이 세상에는 또한 부지기수니라. 어쩌든지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서 목숨을 죽이지 말고 불시 같이 잘 보존허고 있노라면, 그것은 저절로 창성허느니. 목숨이 혼(魂)이다. 혼이 있어야 목숨이야. 어쩌든지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곧 목숨이니라."

- 최명희, <혼불> 6권 중 효원과 청암부인의 대화



휴직하고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는 브런치를 시작한 것입니다. 휴직과 퇴사와 안식기를 고민하는/겪고 계신 분들이 공감과 응원을 보내주셨고, 몇몇 분들은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을 만나 제 경험을 나누어드린다는 것이 저에게도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이 매거진을 시작하며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작은 도움 내지는 레퍼런스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그럴 수 있어 기뻤습니다.


내심 대담한 휴직의 끝에 대담한 변화가 있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했던 모든 고민을 종결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지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요... 아마 고민은 평생 계속될 것 같습니다. “대담한 휴직일기” 매거진은 여전히 고민을 품은 이 글로 마무리하지만, 앞으로도 브런치 글쓰기는 계속하려고 합니다. 휴직하고 걸은 산티아고 길과 유럽여행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고, 놀다가 돌아온 회사원이 겪는 일과 삶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도 계속 기록해 나가려고 해요. 짧게라도 글을 쓰고 공유하는 것이 '영혼있는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제 나름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진 출처: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의 작가 강수희님이 북토크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나눔해 주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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