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time Nov 03. 2020

프로그래머가 만드는 반지

반지 맞추려 오셨나요?

“저는 코딩을 잘 못합니다”


대학교 때 수업을 한번 듣기는 했지만 코딩을 전공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소질도 없습니다. 코딩을 처음 배울 때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무언가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작동되는 모습을 보고 신났던 기억은 있습니다. 코딩은 배울 내용도 많고 체력도 좋아야 되고 꼼꼼해야 됩니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제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코딩을 계속했습니다. 코딩은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나서부터 시작입니다. 수많은 오류와 고객의 요청을 반영해서 무한 반복적으로 다시 코딩을 해야 됩니다. 지루하고 힘든 과정입니다. 야근에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코딩이 재미는 있지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회사에서 업무도 기획과 문서작업, 약간의 코딩 정도였습니다. 점점 더 코딩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 갈수록 코딩 작업이 줄었습니다. 팀원들이 코딩을 담당하게 되고 팀장은 새로운 먹거리를 계속 찾는 일을 하게 됩니다. 못하는 코딩을 안 하게 돼서, 사실 마음도 더 편해졌습니다.


php가 아니고 javascript


“3D 프린팅을 만나다”

3D 프린팅은 오바마의 연설로 유명해졌습니다. 원래 명칭은 적층 가공이라고 해서 재료를 층층이 쌓아서 물건을 제조하는 방식인데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3D 프린팅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코딩 얘기하다고 갑자기 3D 프린팅 얘기해서 당황하셨나요? 먼저 3D 프린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를 먼저 설명드리고 이 얘기를 왜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3D 프린팅 절차


3D 프린팅을 위해서는 먼저 형상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캐드라고 하는 프로그램으로 모델링하거나 스캐너를 통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캐드로 만들어진 형상은 STL 파일 형태로 저장되고 형상을 가로 방향으로 얇게 자르는 가상의 과정을 거칩니다. 슬라이싱이라고 합니다. 얇게 자른 각각의 단면에 일종의 패턴과 같은 해칭을 더한 다음 단면에 있는 모든 해칭 선을 경로로 변경하는데, G-Code라고도 합니다. G-Code 경로대로 재료를 녹여서 층층이 쌓고, 굳게 만들면 실제 물리적인 물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 다수의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3D 프린팅 소프트웨어


모델링을 위한 캐드, STL 파일 변환을 위한 파일 변환기, 변환된 STL 파일의 수정, 슬라이싱부터 G-Code 생성을 위한 슬라이서, G-Code로 3D 프린터에서 출력을 위한 호스트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3D 프린팅을 위해서 3D 프린터 외에 과정 별로 다수의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일반 개인이 모델링을 하고 3D 프린팅을 하기 위해서 3D 프리터와 같이 구비해야 될 소프트웨어가 많습니다. 실제 3D 프린터를 사기도 하는데 일주일 정도 하고 나서는 먼지가 쌓이는 게 현실입니다. 무엇을 할지 막막합니다. 요즘은 3D 프린터가 없어도 STL 파일만 전달하면 대신 출력해주는 출력 대행업체가 많이 생겼습니다. 3D 프린터를 구입하기 전에 먼저 출력 서비스 업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게 좋습니다.  


“종로 귀금속 상가를 방문하다”

반지를 만드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캐드를 이용해서 반지 형상을 플라스틱으로 3D 프린팅 해서 모양을 만들고, 고무 틀에 넣고 왁스로 석고 틀을 만든 다음 금, 은을 녹여 부어서 주물로 만들고 기본적인 세공을 하고 광택을 내면 반지가 만들어집니다. 종로 귀금속 상가 전화번호를 찾아서 그냥 전화를 걸고 찾아갔습니다. STL 파일을 전달하면 반지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종로 귀금속 상가를 방문하고 알았습니다. 세공을 해주는 공방도 소개해 줬습니다. 사무실에서 코딩만 하면 알 수 없는 정보였습니다. 제가 할 일은 캐드 없이 반지 형상을 만들고 반지 형상 데이터인 STL 파일을 공방에 주면 공방에서는 3D 프린터를 이용해서 반지 주물을 만들고 가공해서 줍니다. 저는 만들어진 반지를 판매만 하면 됩니다. 코딩과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서 반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반지 판매 절차


“코딩으로 반지를 만들다”

다시 코딩을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언어로 이전까지 해보지 않았던 코딩을 새롭게 공부했습니다. 브라우저에서 구동되는 방식으로 웹에서 반지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연구했습니다. 이전에 했던 코딩 방식과 크게 차이는 없었습니다. 배워 두면 언제 가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코딩만으로 반지 형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아래 사진의 반지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수학자분의 이름을 따서 보로노이 반지, 혹은 타공 반지라고 불립니다. 실제 망치로 반지를 수십, 수백 번 쳐서 면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손도 많이 가고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반지 형상을 공방에 전달하고 일주일 뒤에 반지를 받았습니다. 일주일이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가상공간에 있던 반지를 처음 받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 화면에 있던 반지가 제 손 위에 있습니다. 손가락 치수도 안 재고 그냥 주문을 해서 너무 작았습니다. 손가락에 맞지 않았던 게 슬펐습니다. 


처음으로 만든 반지, photo by me


“세계 주얼리 시장에서 기회를 보다”

전 세계 귀금속 시장 규모를 확인해 봤습니다. 월곡 주얼리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세계 주얼리 소매시장의 규모는 약 2,086억 달러, 한화로 233조 원입니다. 이중 온라인 시장은 36조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15.5%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귀금속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국내 온라인 주얼리 시장은 7200억 정도인데 앞으로 더 큰 시장 규모 확대가 예상됩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온라인에서 브라우저에도 동작하는 반지 제작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소비자가 직접 반지를 만들고 구매합니다. 갑자기 온라인으로 반지를 팔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저는 자본도 필요 없고 컴퓨터만 있으면 됩니다. 3D 프리터도 필요 없고, 공방을 차릴 필요도 없습니다. 


전 세계 주얼리 시장 규모


“본격적으로 반지를 만들자”

저는 다시 코딩을 시작했습니다. 재미있어서, 창작을 하는 게 신나서 작업했습니다. 한때는 코딩이 싫었습니다. 고객의 무리한 요구, 촉박한 일정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코딩으로 반지를 만들면서 이전에 절대로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시야도 넓어졌습니다. 반지를 만들면서 했던 작업들이 이전에 회사에서 했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더 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해야 될 일도 많고 직접 누군가를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도 더 많아지겠지만 반지 만드는 일이 기대됩니다. 저는 오늘도 코딩으로 반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 매출은 0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