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교수님께 다시 마음을 전하기까지

by 에밀리


정일준 교수님.png 정일준 교수 (출처: 고려대 사회학과 홈페이지)


요즘 저는 다시 사회학 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입시와 취업, 이직과 병원, 학원과 회사 사이를 오가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에 생생한 얼굴을 부여해 주셨던 교수님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의 정일준 교수님입니다.


1. 수업 그 자체보다도 더 또렷하게 남은 장면


제가 정일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전사회이론’ 강의였습니다. 사실 수업 내용은 명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수업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점수가 아니라 한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조용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게임중독에 빠진 학생이 있었고, 교수님은 그 학생을 돕고 싶어 직접 자취방까지 찾아가셨다고요. 그러나 끝내 그 학생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교수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때 교수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2. “아니에요, 교수님”이라고 답했던 순간


그 순간 저는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물음에, 거의 반사적으로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교수님.”


사실은 그 한 마디에 담고 싶었던 말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건 교수님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개인의 선택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일 거예요. 교수님 혼자 책임지셔야 할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제가 공손하지 못하게 들릴까 봐, 그 말을 끝까지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을까”를 자책하는 교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게 정일준 교수님은, 단지 이론을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타인의 삶 앞에서 자기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고민하는 연구자이자 교육자”로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3. 사회구조와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다 보면 늘 두 가지 축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하나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 다른 하나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조입니다. (혹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측면도 고려할 때가 있습니다) 게임중독에 빠진 학생의 사례 역시 그런 맥락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의 습관, 성격, 환경, 경제적 조건, 가족관계, 문화적 요인… 수많은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선의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교수님의 “내가 잘못한 걸까”라는 물음은, 저에게 사회학이란 결국 “누구의 잘못인가”를 단순히 가르는 학문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더 깊이, 더 넓게 바라보도록 이끄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4. 한 남초 회사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시간이 흘러 저는 졸업 후 여러 직장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회사 세 곳, 병원 다섯 곳, 그리고 긴 영어 강사 생활. 그렇게 바쁘게 달려오던 중, 올해에는 한 남초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다시 한 번 “구조와 개인”의 문제를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과중한 업무, 거칠고 폭력적인 언행, 쉬이 바뀌지 않는 조직 문화.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결국 제 몸이 먼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진단명은, “미상 및 상세불명의 병인”.


입원과 검사를 반복하며 저는 처음으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정말로 제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5. 다시 사회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쉬는 동안 저는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사회학 책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익숙한 이름들, 들어본 적 있는 개념들, 강의 시간에 들었던 교수님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른 사람이 바로 정일준 교수님이었습니다. 게임중독 학생의 자취방 앞에 서 있던 교수님의 모습, “내가 잘못한 걸까”라는 물음, 그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아니에요, 교수님”이라고 답하던 제 자신.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공부하고 싶다. 그때 미처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한 시선으로 마주해 보고 싶다.


6. 장학금을 여쭙는다는 것의 의미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습니다. 다시 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상당히 쏟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학금은 제게 매우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기를 내어 정일준 교수님께 메일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메일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사회학과 OO학번 제자라는 것,

고전사회이론 강의에서의 그날 수업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

최근 한 남초 회사에서의 경험과 스트레스성 질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일을 잠시 내려놓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제가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다시 학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 문장을 쓰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습니다. 마치 제 처지를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같기도 했고, 교수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부탁을 드리는 일뿐이었습니다.


7. 교수님의 답장을 받고


메일을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은 마음이 조용히 떨렸습니다. 답장이 올지, 혹은 너무 바쁘신 일정 속에서 제 사연이 묻혀버리지는 않을지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교수님께서 직접 답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김진영 졸업생, 연락 반가워요. 통화하죠.
제 번호는 OOO-OOO-OOO 입니다. 먼저 문자 보내세요.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습니다.”


짧지만 따뜻하고 분명한 문장이었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때 그 강의실 앞줄에 앉아 작게 “아니에요, 교수님”이라고 말하던 스무 살의 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스승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에는 늘 시간이 필요했지만,
스승은 단 한 번의 답장으로 제자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교수님 번호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시 후 교수님과 통화하게 될 때,
어떤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두렵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저는 다시 사회학의 자리로 돌아가는 첫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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