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 선수의 "감독" 논란,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

by 에밀리

최근 열린 한 마라톤 대회에서 삼척시청 소속 이수민 선수가 우승했다. 축하받아 마땅한 순간이었지만, 대회 이후의 장면은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골인지점에서, 숨이 가쁘고 어지러운 상태의 선수를 감독이 강하게 끌어안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포옹이 아니라, 선수의 명백한 거절 의사에도 불구하고 행동이 지속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수민 선수는 이후 입장문을 통해 세 가지 핵심을 분명히 밝혔다.


첫째, 감독의 행동을 성추행이라고 단정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골인 직후의 몸 상태를 고려할 때, 감독의 행위는 추가적 통증과 신체적 고통을 유발했고, 거부 의사가 반복적으로 표현되었음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문제 제기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다.


둘째, 감독으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셋째, 향후 불이익이 두렵지만, 재발을 막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선수의 위치에서 이러한 발언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런데 정작 이 입장문을 완전히 다르게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


“악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감독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니냐”
“감독의 정이었을 수도 있지 않나”


이런 반응은 문제를 단순 ‘감독 개인의 선의 여부’로 축소한다. 그러나 이 사안은 선의·악의의 문제가 아니다. 신체적 통제권과 거부 의사의 존중이라는, 기본적이고 명백한 원칙의 문제다.


특히 여성 선수의 몸에 대한 ‘감독의 권한’이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가?
선수의 의사가 우선인지, 감독의 감정이 우선인지?
이 논쟁은 바로 그 사회적 감수성의 차이를 드러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입장문을 오독하며 감독을 감싸는 이들의 ‘논리 구조’다.
그들은 문제를 권력, 신체, 안전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대신 ‘의도’라는 모호한 영역으로 논점을 계속 이동시킨다. 마치 “나쁜 뜻이 없었으면 괜찮다”는 듯이.


그러나 신체적 고통과 거부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는, 의도가 어떠하든 문제가 된다. 운동선수의 몸은 감독의 것이 아니며, 감정적 포옹조차 선수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 사안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의 부재’가 아니라, 감독의 행동을 비판하는 데조차 불편함을 느끼는 사회의 구조적 감수성 부족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스포츠 현장에서,


“감독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훈련 과정에서 흔한 일이다”


라는 말을 너무 쉽게 들어왔다.


하지만 바로 그 익숙함이 문제를 만들고, 재발을 낳는다. 입장문을 있는 그대로 읽는 일, 선수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는 일,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행동을 다시 해석해 보는 일. 이제는 스포츠계에서도 그 기본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감독을 감싸며 문제를 희석시키려던 어느 SNS 이용자의 자기소개 한 줄이 무심히 눈에 들어왔다.


‘아들 셋의 아빠입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많은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감수성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온 사람들,
문제를 문제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의 몸보다 자신의 경험 세계를 우선하는 태도.


어쩌면 문제의 출발점은 그 한 줄에서 이미 드러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18화사교육 시장의 착취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