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지막편) 맥길로이를 만난 날

꿈은 닮아 간다_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흔히 주말골퍼들끼리 역시 골프는 '4∙19~10∙26'이라고 한다. 누구는 시작이 4∙19가 아니라 5∙16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곡절이 많았던 우리 역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골프를 즐기기에 아주 맞춤인 날씨와 골프장 상태가 유지되는 때가 이때라는 이야기다. 바로 이때 그 많은 주말골퍼들의 시즌이 펼쳐진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 시즌을 벌써 열 번도 더 넘게 지나왔다. 시즌이라. 그동안 나는 골프 열정만큼은 항상 시즌 중에 있었다. 그것이 골프를 시작한 숙명이라고 한다면 숙명일 것이다.


단테는 자신의 걸작 '신곡'의 프롤로그에서 “인생길 반(半)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순수한 영혼을 가진 베아트리체를 길잡이로 지옥과 연옥, 천국으로의 그 유명한 여정에 나선다. 인생 절반의 시점. 지금은 백세 시대라고 하니까 나도 막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난 지점에 서 있는 것이겠다. 그동안 올바른 길을 가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 역시 길을 잃거나 여러 고비를 만났고, 때론 두려움에 흔들릴 때도 있었다. 인생이란 것이 누구한테나 그런 것일 테다.


내 인생을 4월에 시작해 10월이면 마무리되는 주말골퍼의 시즌 달력에 대입해 보자면, 나는 지금 뜨거운 7월 어느 시점쯤에서 서성이고 있을 게다.



골프장 잔디가 파랗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4월, 봄꽃이 만발한 5월에는 나 역시도 벅찬 꿈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젊었고, 가슴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내가 푸른 군복을 입고 있을 때다. 우연히 처음 듣고 완전히 매혹돼서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노래가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인 메리 홉킨의 ‘Those were the days’다. 달콤한 목소리가 아주 빼어났는데, 그렇게 젊음이 한창인 여가수(1968년 노래를 발표했을 당시)가 옛날 그 선술집에서의 추억과 당시의 꿈을 이야기한다는 가사가 왠지 모를 애수를 불러왔던 거다. "우리는 영원히 춤추고 노래할 것만 같았어... 우린 젊었고 확신에 차 있었거든"이라고 노래했기 때문에. 그때 나도 그랬다. 젊음이 영원할 거 같았고, 무슨 일이라도 성취해 낼 거라고 의심치 않았으니까.


골프 달력 6월과 7월은 인생의 신산(辛酸)과 그 대척점에 있는 행복의 양 갈래 길을 거쳐 지나온 시기였다. 정호승 시인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세상이 도통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인지 한탄도 했다. 정희성 시인처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서야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간 나날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임희숙의 노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와 같이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다. 빌리 조엘이 ‘피아노 맨’을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게 1973년이다. 술집을 찾아든 손님들은 저마다 사연이 많다. 바텐더 생활을 청산하고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존, 소설가를 꿈꾸는 부동산 중개인 폴, 자유로운 삶은 갈구하는데도 얽매인 삶을 사는 해군 데이비까지……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거나 살고 있다.



내 골프 달력으로, J가 기억할 만한 6~7월 행복의 시간들을 추억해 보자. 로리 맥길로이가 한국오픈에서 준우승한 2013년, 나는 J와 천안의 우정힐스cc로 향했었다. 골프에 한창 빠져 있던 나는 세계적인 스타 맥길로이가 온다고 골프의 골자도 모르는 J를 끌고 그곳에 갔다. 날은 정말이지 한창 푸르렀고 맥길로이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야말로 한창때였다. 그의 폭발적인 드라이브 샷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 그의 신기에 가까운 스윙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20대 초반이던 맥길로이가 이제 30대 중반이 됐다. 시간은 누구한테나 똑같이 그렇게 흘러간다.


J는 2018년 여름부터 1년 간 영국 런던에서 연수했다. 나는 휴가를 내서 런던을 수시로 찾았다. 그때 한 선배와 식사를 같이 하게 됐는데, 갑작스럽게 골프 라운드에 나를 초대했다. 친구와 라운드가 있는데 나오라는 거였다. 그래서 급히 골프 옷을 사고 클럽을 렌트해서 라운드에 나갔다. 유럽에서 처음 친 골프였다. 셋이 라운드를 돌았는데 보채는 이가 없어서 이야기도 서로 많이 나누었다. 처음에는 골프 얘기로 시작했다. 그러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날의 평온한 골프는 저녁노을이 번질 때쯤 끝났고, 우리는 헤어져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 골프 달력으로 이제 무더운 7월 말이다. 벌써 많이도 지나왔다는 생각도 든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쏜 살과 같이 마흔을 지나더니 어느새 쉰 즈음도 넘어섰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숱한 나날들이 나한테는 남아있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생은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다.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 같은, 언제까지나 영원할 친구들이 나한테는 많다. 그들은 나와 같이 지금 7월의 골프를 즐기고 있지만 여전히 “푸른 파도 마시”며, 젊은 날의 “뛰는 가슴 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렇다.


곧 J와 첫 골프 라운드를 나가게 될 것이다. J는 한참 와인을 좋아하더니 요즘은 위스키에 빠져 있다. 그늘집에서는 막걸리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같은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 오늘이 쌓이고 쌓여서 내일을 만든다. 오늘을 가장 행복한 날로 만들자. 대한민국 주말골퍼들이여, 건투를 기원한다.


'무림고수 K의 골프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곧 골프와 무술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소설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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