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_무림고수 K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했다. 스스로 재주를 가름할 길이 없으나 좋아해 계속해 쓰다 보면 나중에는 흥미로우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처음에는 몸에 힘 빼고 가볍게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중에 골프 고수가 되는 이청풍이라는 주인공을 앞세워 소설 도입부를 쓴다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 청풍은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했는데 운동도, 게다가 싸움까지 잘했다고 치자. 응답하라 1988, 딱 그 시대 소영웅이라 하겠다.
청풍은 산 좋고 물 맑은 지방의 한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분지 지형 한 중간에 터잡은 자그마한 도시. 인구 이십 만 남짓한 그곳을 휘감는 호수와 거기서 철에 따라 짙게 또는 옅게 피어나는 안개가 많다고 해서 외지 사람들이 흔히 ‘호반의 도시’라고 불렀는데, 정작 그곳 사람들은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곳 자연은 태곳적 모습 그대로 사람들 삶 속에 깊게 녹아 들었을 뿐이다. 산을 닮아 순하고, 물을 따라 유연한 사람이 많았다. 크게 욕심 내는 법 없이 만족하며 살았다. 겨울 바람은 매서워 호수를 온통 꽁꽁 얼려 놓았으나 봄바람이 불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천으로 꽃이 피었으니 저마다 혹독함을 견뎌내는 힘도 가지게 되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가 당시의 고명한 작명법은 몽땅 내다 버리고 아예 신식으로다가 ‘산처럼 푸르게’ 청(靑), 그러면서도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풍(風)이라 이름 지어서인지 청풍은 어려서부터 들로 산으로 쏘아 다니길 좋아해서 저녁놀이 붉게 물들 때쯤 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양념으로 재미 요소를 조금 넣자.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하다가 친구들끼리 시비가 붙는다. 힘 센 아이들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힌다. 청풍이 나서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친구끼리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청풍이 마지못해 나섰다. 그때였다. “뭐가 심~해”라는 소리와 함께 덩치의 주먹이 청풍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 것이. 청풍이 ‘심’ 소리를 들었을 때 덩치의 왼쪽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먼저 보았으므로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주저앉듯 낮춘 청풍은 허리를 꺾은 채로 반사적으로 왼손 훅을 녀석의 옆구리에, 바로 튕겨 일어서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얼굴에 꽂아 넣었다. 180센티미터의 거구가 그대로 뒤로 쿵 넘어갔다. 녀석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청풍에게 ‘와와와~’ 달려 들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청풍은 바람처럼 빨랐고 강처럼 유연했으며 산처럼 단단했다. 초가을 그날 저녁의 싸움을 목도한 녀석들 입에서 ‘청풍이 태권도 이단 옆차기로 날아올라 덩치의 면상을 날렸다’, ‘덩치는 타고난 천하장사였으나 청풍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청풍이 그때까지 태권도의 ‘태’ 자도 모르는 무술 문외한이었으므로 무슨 이단 옆차기까지 꽂아 넣었을 리 만무지만 나름 세련된 주먹질과 되는 대로의 발길질까지 하긴 하였다. 그리고 약 30여초의 공방 사이에 우와와 덤벼든 덩치가 코가 깨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면서도 청풍의 몸에는 손 한번 대지 못한 것 역시 팩트였다. 그때부터 청풍은 타고난 천재 파이터, ‘천.파.’로 불렸다.
천파 청풍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다가 무술을 제대로 배워 보겠다고 도장을 찾아가게 된다. 거기서 시대의 고수 항룡(亢龍) 노사를 만난다. 돌아오는 길.
“부드러움(柔) 속에서 강함(剛)이 나오고, 강하면 곧 부드럽게 된다.” 도장을 나선 청풍은 항룡 선생의 말씀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게다가 선생이 아까 청풍의 어깨와 팔, 손을 어루만지던 감각이 기이할 만치 생생했다. 두툼한 손을 통해 전해져 오던 바로 그 감각. 한없이 부드럽지만 움켜쥐려고 하면 결코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감춘 손. 촉수라도 달린 듯 착 달라붙어오던 손바닥과 손가락……
그러다 청풍의 눈에 하늘 높이 뜬 만월(滿月)이 들어왔다. 얼마나 오랜만에 올려다 본 하늘인가? 달 주변으로 옅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저 하늘 위에도 바람이 부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인가. ……
도입부에는 물론 여주인공도 등장해야 한다. 고교시절 청풍을 몰래 짝사랑했던 후배 강선화(姜善花)가 우연을 가장해 청풍을 도장으로 찾아온다. 알고 보니 선화는 KLPGA 투어프로였고, 후일 그녀에게 골프를 처음 배운 청풍은 PGA에 진출해 메이저 대회까지 석권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짜보자.
벌써 3시간째 수련. 청풍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다. 누군가 땀으로 응건한 도복이 딱 달라붙은 등판을 ‘찰싹~’ 때린 것이. 가녀린 손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청풍. “청풍 오빠!” 청풍은 그만 가슴이 쿵 떨어져 내렸다. ‘오빠~’ 라니! 아직까지 그를 오빠라고 부른 여자애, 아니 여성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빠 대신 친하면 형, 안 친하면 선배라고 불렀지 누구도 청풍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누굴까?’ 청풍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다 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 때문인지 눈이 확 부셔왔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한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기며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시원하게 큰 눈에다 오똑한 콧날, 얇은 입술에 갸름한 턱선, 태닝을 한 것 같은 건강한 피부. 미인이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그러고 보니 눈과 콧날이 청풍 자신과 닮았다. 둘이 나란히 서면 남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보였다. 청풍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숙맥 청풍은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오금을 저려야 마땅한 상황에 웬걸 그렇게 대범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러니까 대한민국 주말골퍼들 대개가 그렇듯, 나 역시도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20여년이 넘도록 장기휴가를 가보지 못했다. 음, 가려고 했으면 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렇게 마음먹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지만 말이다. 만약 나에게 내 맘 대로의 시간이 몇 달쯤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만큼의 책과 골프 캐디백을 싣고 떠나련다. 자연에 파묻혀 골프를 치고, 볕과 바람이 좋으면 나무 아래서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는다. 저녁이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잔을 기울여도 좋겠다. 그렇게 마음이 촉촉해져 오면 이것저것 글을 써 보리라. 물론 그런 여행이라면 J가 무지막지하게 큰 트렁크를 여러 개 준비해 총총 따라 나설 게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산처럼 푸르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 바로 우리 주말골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