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대화, 포옹의 언어
탱고는 포옹으로 시작된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내밀함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것은 '아브라소(Abrazo)', 즉 포옹입니다. 사람들은 탱고를 격정, 유혹, 관능의 춤으로만 생각하지만, 그 기저에는 서로를 감싸 안는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포옹이 있습니다. 탱고는 아브라소로 시작해 아브라소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삶의 시작과 끝이 따뜻한 품 안에 있듯이 말입니다.
이 포옹은 단순한 안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밀롱가에서 만난 사람과 나누는 원초적인 소통의 언어입니다. 아브라소는 파트너에게 건네는 영혼의 포근한 인사이자 서로의 호흡과 심장 박동을 공유하면서 말없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는 치유의 의식입니다. 탱고에서 아브라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인사법입니다.
탱고는 포옹 안에서 숨 쉰다
탱고는 아브라소로 시작됩니다. 리더와 팔로워가 물리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연결되는 방법입니다. 리더는 가슴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침묵의 신호를 보내고, 팔로워는 그 신호를 아브라소를 통해 감지하고 반응합니다. 이 깊은 연결이 없다면 탱고를 출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상체가 거의 맞닿을 듯 가깝게, 때로는 부드럽게 맞닿은 상태로 서로를 감싸 안는 자세가 아브라소입니다.
이 밀착된 포옹 안에서 두 사람은 외부와 차단된 둘만의 작은 우주를 만듭니다. 파트너의 미세한 무게 중심 이동, 숨 쉬는 소리, 반도네온 선율에 반응하는 근육의 움직임이 아브라소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낯선 이의 심장 박동이 나의 심장에 닿는 순간, 우리는 언어를 뛰어넘는 태고의 교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소는 춤을 추기 위한 준비자세가 아닙니다. 춤 그 자체입니다. 아브라소는 춤을 추는 내내 유지되어야 합니다. 리더는 팔로워를 초대하고 보호하며, 팔로워는 자신의 존재를 리더에게 맡깁니다. 이 포옹이 견고하고 편안할수록, 두 사람의 걸음은 마치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처럼 자유롭게 흐릅니다.
탱고가 말하는 위로의 언어
'아브라소'는 스페인어로 '포옹하다', '감싸 안다'는 뜻을 지닌 'Abrazar'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탱고에서의 아브라소는 그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깊은 감성적 함의를 지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포근한 감싸 안기이며, 상대의 존재를 선입견 없이 수용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이 포근함이 깊이 느껴지는 이유는, 타인의 직업, 배경, 나이, 혹은 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는 수용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밀롱가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있는 타인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의 심장 가까이 받아들입니다.
이 포근함은 탱고의 탄생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19세기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보카 항구에는 유럽 각지에서 막연한 꿈을 안고 건너온 이민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온 외로운 영혼들이었고, 낯선 땅에서 가난과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탱고는 그들의 고독과 슬픔 속에서, 그리고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은 갈망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에게 아브라소는 단순한 춤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주던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반도네온의 구슬픈 선율 속에서 서로를 감싸 안는 그 순간만큼,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소는 '당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압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이런 배경이 탱고의 아브라소를 더 깊고, 인간적인 울림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가슴과 가슴 사이의 위로
아브라소가 지닌 힘은 치유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슬픔과 결핍을 안고 밀롱가를 찾습니다. 탱고 음악에는 특유의 슬픔과 우수, 그리고 그리움이 있습니다.
아브라소는 이 상처를 직접 치료하거나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건네는 깊은 공감입니다. 상처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존재 자체를, 그 아픔과 함께, 품어 안는 행위입니다.
한 곡의 탱고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브라소 안에서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낍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이 자세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원초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우리는 서로의 호흡에 맞춰 같이 걷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미세한 움직임이 아브라소를 통해 공유될 때, 우리는 말없이도 상대방의 상태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브라소 안에서 우리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약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파트너는 그 약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팔로 온전히 감싸 안아 줄 뿐입니다. '상처를 보듬어 안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상처를 파헤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존재 자체를, 그 상처의 아픔과 함께, 말없이 껴안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많은 탱고 댄서들이 탱고를 '움직이는 명상'이자 '심리 치료'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아브라소라는 안전한 공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소를 통해 서로의 깨어진 조각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맞춰보고, 그렇게 한 곡이 끝나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아브라소가 왜 진정한 인사인지, 왜 영혼의 만남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나누는 인사는 형식적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한 악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한 가벼운 포옹은 진정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기능에 가깝습니다.
탱고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면 아브라소를 합니다. 이 아브라소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당신에게 집중하겠습니다. 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며, 당신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탱고의 아브라소는 "나는 당신을 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나의 모든 감각으로,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는 가장 완벽한 인사입니다.
춤이 끝난 후 나누는 아브라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짧은 만남을 통해 깊은 교감을 나눠 주어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표현이자, 서로의 영혼이 스쳤음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탱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한 인간과 오롯이 연결되는 경험입니다. 세속적인 판단과 계산을 내려놓고, 타인의 슬픔과 기쁨을 나의 심장 가까이에서 느끼며, 그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아브라소. 자신마저 사랑하기 버거운 이 시대에,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는 치유의 순간입니다.
아브라소는 우리에게 어떻게 서로를 보듬어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연약함마저도 기꺼이 포옹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깊은 영혼의 품입니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함께, 홀로 서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지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마음에도, 이 포근하고 진실된 아브라소의 온기가 깊이 스며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