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까베쎄오

침묵의 초대

by Freewinds

운명이 스치는 순간


어둑어둑한 불빛 사이로 반도네온의 선율이 공간을 채웁니다. 플로어 가장자리에서 머뭇거리던 한 남자의 시선이 문득 당신을 향하더니, 조용히 고갯짓을 합니다. 그 순간, 우아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바로 '까베쎄오'입니다. 스페인어로 '고갯짓'을 뜻하는 이 말처럼, 한마디 말도 없이 오직 눈빛과 고갯짓만으로 이루어지는 춤의 초대장. 당신이 그 시선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고, 조용히 눈길을 거두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흩어집니다.


단 몇 초의 침묵 속에서 운명이 갈리는 이 찰나. 우리 삶과 닮아있지 않나요?


4.png


조용한 결심의 순간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까베쎄오'를 경험해 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의 문을 열었을 때, 망설였던 도전을 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디뎠던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떨림까지…


결과는 알 수는 없지만,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춤판에서 기회는 늘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의 결심을 기다립니다. 너무 조급하면 놓치고, 너무 늦으면 후회만 남죠.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적절한 순간임을 알아채고 용기 내어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png


거절, 그 아름다운 권리


탱고는 또 다른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거절'에 대한 이야기죠.


춤을 청한 남자에게 여성이 눈길을 거두는 것, 그것은 무례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충실한 정직한 대답이자, 나를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혹시 상대방이 내키지 않아서일까요? 아니요. 그저 그날의 내 기분이, 지금 흐르는 음악이, 혹은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아서, 아직은 춤을 원하지 않는다는, 나 자신에 대한 솔직한 표현입니다. 거절은 내 마음이 정하는 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든 요청에 '네'라고 답하며 나를 밀어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은, 누구보다 당신이 지켜야 할 소중한 권리니까요.


Generated Image November 14, 2025 - 7_10AM.png


우아한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법


밀롱가에서 거절은 흔한 일입니다. 때로 내가 선택받지 못해 조금 서운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 또한 탱고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일 뿐입니다. '누구와 춤을 출까?' 하는 것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내키지 않을 땐 품위 있게 거절할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를 지켜내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탱고가 우리에게 주는 진솔한 교훈입니다.


혹시 까베쎄오에 실패했더라도, 거절당했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닙니다. 거절당한 사람은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담담히 다음 곡을 기다릴 뿐이죠.


이 모습이 바로 마음의 단단함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좌절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다시 용기를 내어 새로운 까베쎄오를 준비하는 자세, 그것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거절은 끝이 아니라, 다음 춤을 위한 휴식 같은 것이라고 말이에요.


12.png


나 만의 춤을 향한 여정


포옹도, 대화도, 모든 것은 눈빛에서 시작됩니다. 그 짧은 순간의 눈빛만으로도 상대와 밀담을 나누는 듯한 설렘이 있습니다.


까베쎄오는 단순한 눈짓이 아닙니다. 그것은 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자, 상대를 향한 존중과 배려입니다. 빠르고 확실한 것이 당연해진 요즘, 까베쎄오처럼 느리고 섬세한 대화는 드물죠.


우리 삶은 완벽한 파트너를 찾아내는 여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까베쎄오와 거절 속에서 나만의 춤을 찾고, 완성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용기 있게 손을 내밀고, 때로는 현명하게 거절할 줄 알며, 춤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순간순간 오롯이 '나'만의 춤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쉬움을 받아들이고, 가만히 자세를 가다듬은 뒤, 다시 천천히 다음 눈빛을 보낼 준비를 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어둠 속에서 반도네온의 선율이 울려 퍼질 때, 침묵의 언어로 시작되어 영혼의 춤으로 완성되는 우리들의 이야기, 그 모습이 얼마나 눈부실까요?


10.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걷기, 예술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