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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03. 2020

4-07.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던 진짜 이유

도덕을 비판한 니체

니체가 도덕 비판에 있어 최고로 빚을 진 인물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칸트보다 100년도 더 앞서 활동했음에도 칸트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윤리학을 정립했다. 그의 발상은 상당 부분 200년 후의 니체에게로 이어졌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도덕이란 인간의 무지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것을 선한 것, 고통을 주는 것을 악한 것이라 판단한다는 거다. 하지만 나의 특정 행동이 바로 내 앞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지 몰라도 그 행동이 돌고돌아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계산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스피노자에게 그러한 생각이 가능했던 이유는 앞서 소개한 대로, 그에게는 우주 자체가 곧 신이고, 따라서 나와 너 혹은 다른 모든 대상들의 구분이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의 플러스가 다른 쪽에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데, 이때 플러스를 받은 쪽은 그를 도덕적이라 판단할 것이고, 마이너스를 받은 쪽은 부도덕하다 판단할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한 판단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도덕이란 자기 앞만 생각할 줄 아는 인간 무지의 소산이라는 거다.


스피노자가 도덕을 비판한 또 한 가지 지점은, 도덕이 당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도덕을 당위로 여긴다. 그들에게 도덕이란, 꼭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거나, 하면 좋거나 혹은 나쁜 무언가다. 하지만 신체를 떠난 정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스피노자에게 우주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당위적 명제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개체가 당면한 특수한 맥락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아담의 낙원추방을 악덕으로 해석하는 성서적 입장에 반대했다. 스피노자에게는 애초에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인간의 망상일뿐더러, 백번 양보해 절대선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할 가능성 자체도 존재하지 않아야 타당하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행위가 악이라면, 그러한 선택 자체가 불가능했어야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아담의 선악과 먹기를 다르게 해석다.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금지는 아담의 무지에 근거한 망상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의미였다는 거다.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복숭아를 절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것이다. 하지만 알러지는커녕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아이에게 엄마의 명령은 무조건적 금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특성과 자연 각각의 성질을 모르는 아담에게 ‘선악과 섭취 금지령’은 당위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선악과가 아담에게 해롭다”는 명제는 당위가 아니라 사실판단이다. 원래 도덕이란, 한 개체와 개체의 만남이 본성적으로 해로울 수 있다는 지극히 사실적·과학적 레벨의 진술임에도, 자연의 특징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그러한 사실은 그저 영문 모를 당위로만 다가왔던 거다. 그것이 도덕의 기원이라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니체가 한때 스피노자를 존경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도덕에 대한 위와 같은 통찰 덕분이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발상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니체는 도덕을 약자의 자기방어 혹은 합리화라고 보았다. 니체의 세계관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가령,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자가 잔인하다거나 부도덕하다 말할 수 없으며, 양이 불쌍하다고 볼 수도 없다. 양을 잡아먹는 건 사자의 본성이므로, 그 본성을 탓하거나 제지해선 안 된다. 그것은 사자에게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자의 식욕을 사람들은 폭력적이라 탓한다.


사자-양 비유가 서로 다른 종이므로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이 비약이라고 느껴진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자. 침팬지는 수컷들끼리 서열을 정해 1순위만 암컷들과 마음껏 짝짓기를 할 수 있고 2순위 이하는 짝짓기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때 짝짓기를 독점하는 1순위를 악하다고 규정짓는 것은 자연에 어긋난다. 그를 타일러 다른 수컷들에게 짝짓기 기회를 주도록 권유하는 것은 도덕을 빙자한 반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반(反)과학이다.


니체에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졌는데, 각 개성은 현실에서 우열로 귀결되는데, 어떻게 1등과 꼴찌가 같은 위치에서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냐는 게 니체의 불만이었다(그래서 니체는 마르크스주의를 극혐했다). 약자들은 강자가 두려웠을 것이다. 언제든 강자들이 자신들을 사회에서 퇴장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약자들이 개발한 것이 도덕이다.


현실 세계에서 약자는 강자한테 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강자의 을 선악이라는 당위로 평가하는 것. 너 얘 부려먹으면 안 돼, 너 얘 꺼 가져가면 나빠. 그렇게 강자의 행동을 멈추고 입을 틀어막는 것. 그것이 약자들의 논리였다. 그 도덕 덕분에 인간 사회는 역사를 거듭하며 점점 하향평준화되어 갔다. 강자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쇄당했기 때문이다. 엑스멘으로 비유하면 뮤턴트가 초능력을 쓰는 것이 범죄라는 거다. 그들도 일반인처럼 행동하도록 제지당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러므로 도덕은, 평균으로 회귀하는 평준화가 아니라 최하로 치닫는 평준화인 셈이다. 그것이 니체가 자기 시대를 개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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