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이 Jan 02. 2017

서정주의 <신부>는 남성중심주의를 강화하는가

인문학: 비판을 넘어 포용으로

서정주의 <신부>를 읽고 한 학생이 나에게 분노를 표했다.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서정주는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는 가부장제에 기반해 여성들의 평생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게 아니냐고. 그리고 그걸 읽는 독자들은 이 시를 보며 여성의 정절에 감탄하며 심미감을 익혀 온 게 아니냐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어떤 작품을 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1차적으로 나 스스로 서정주의 <신부>를 '여성의 정절'을 키워드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만 조선적인 삶과 생활관을 소재로 시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 정도로 느슨하게 이해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생각한 그 '조선적'이라는 것에 이미 가부장제가 포함된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를 읽으며' 남성중심적인 시선을 키워온 것인가(방점은 '이 시를 읽으며'에 있다. 나는 이 시가 아닌 수많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이미 일정 수준의 남성중심적 관점을 장착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시가 조선적 삶을 옹호하거나 찬양한다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게다가 서정주가 조선적인 것을 두둔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사진작가가 박정희의 영정을 찍어서 작품으로 내놓았다면, 우리는 그 작품이, 그 사진작가가 박정희를 찬양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문학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작가가 A를 보여주는 것이, 그가 A를 옹호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당연히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결론은, A를 보여준다고 무조건 A를 지지한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서정주의 <신부> 또한 작품 속 신부의 태도를 다른 여성에게 강요하거나, 그런 삶을 교육받은 신랑과 신부를 두둔하거나, 그렇게 강요한 사회와 시대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남성들과 사회에 의해 억압받으며 살아온 것에,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그동안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가르쳐 왔다. 물론 그러한 관점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비판적인 관점'만' 가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문학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문학이라는 이름 속에서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이 극복되어야 할 문제점으로 묘사되기만 한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미 한 시대를 살다간 그녀들의 삶은 또 무엇이 되는가.


서정주가 이 시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위와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평생이, 다홍치마와 색동저고리로 곱게 단장하고 말없이 집 안에만 머무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삶에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지막 부분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는 그 고민에 대한 답으로 읽힌다. 매운 재가 여성의 아픔과 고통을 의미한다면, 그것이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음을 우리는 뒤늦게 보는 것이다. 이때 그들의 삶이 예술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가치평가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