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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10. 2020

5-06. 왜 유아 시절은 기억나지 않을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

쾌락충동과 충동실현 사이의 시간적 괴리에 대해 아주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자. 사실 인간에게 중요한 건 현실 자체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정신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에게 정작 중요한 건 현실에 대한 정신적 상흔이다. 현실에 대한 정신의 현재적 상을 지각이라 부르고 과거의 상을 기억이라 부른다. 소망충족을 꼭 현실적 차원에서 성취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간 아기는 소망충족이 지연될 때 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환상이다.


울음이나 소리지르기 등이 현실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소망을 충족시키는 노력이라면, 그것이 계속 좌절될 경우 아기는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써 소망을 충족시켰다는 지각 또는 기억을 가지려 한다. 그것은 아기만의 해결책이 아니다. 성인 또한 마찬가지다. 꿈이나 환각 심하게는 정신질환 등이, 지연되거나 금지된 소망을 충족시키는 정신의 우회적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약간의 소망충족 지연은 억압이 아닌 환상으로 대리 충족시킬 수 있으며, 아기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유아 시절의 불쾌했던 기억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억압으로 사라질 기억은 유아 시절의 일부여야 할 텐데, 왜 아기 시절의 기억은 몽땅 삭제되어 있을까?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엔 한계가 있다. 모든 인간은 3-4세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아기가 자신의 모든 기억을 모조리 망각해야 할 만큼의 충격적인 금기 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비도’라는 말은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일컫는 개념이다. 흥미로운 건 리비도의 개념이 정신분석학파에 따라 아주 상이하게 해석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융의 리비도가 다르고 아들러의 리비도가 다르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성충동이었다. 잠깐 이 개념이 탄생한 맥락을 살펴보자.


모든 생명체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본능은 2가지다.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물에겐 그 2개의 본능이 적절히 필요한 시점에만 발동하고 그 외 시점에선 발동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시도때도 없이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을 표출한다. 인간은 배불러도 맛있는 걸 먹고 싶고, 피임하면서도 성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인간에겐 동물과는 다른 또 다른 특성이 있는데,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둔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이 발견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의 생명 질서를 유지하려는 생존 본능이라는 축과, 타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번식을 꾀하려는 생식 본능의 축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자기애)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애야말로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이 될 수 있으며 그 자기애의 근본 동력이 리비도가 된다.


리비도의 대상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리비도의 에너지가 대부분 자신에게 향하면 나르시스트가 되고 극단적이면 정신병자가 된다. 구강기 때 리비도는 입에 집중되고 항문기 때는 항문에, 남근기 때는 남근에 집중된다. 그럼에도 유아기 전반적으로 가장 많은 리비도가 향하는 대상은 엄마의 젖가슴이고 엄마의 품이다. 엄마야말로 아기의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쾌락)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남아와 여아 모두에게 해당한다.


유아 시절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동생은 갑자기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왔을까? 아직 생식 기관이 성숙하지 않은 아기에게 성기는 소변을 배출하는 신체 기관일 뿐이다. 아기들은 남자/여자라는 성별 구분에 대한 인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의 경우 모든 사람이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에게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후 자신이 엄마의 남근이 되어주겠다고 소망한다.


여아의 경우는 다르다. 남자들의 남근을 본 여아는 자신에게 남근이 없음을 알고 허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이 남근이 없는 엄마를 원망한다. 엄마에게 남근이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남근을 물려주지 못한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남근을 가진 아빠를 선망한다. 이렇게 남아는 엄마를, 여아는 아빠를 욕망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일생 동안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엄마에겐 아빠가, 아빠에겐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남아는 아빠와 경쟁을 벌이려 하지만 그 시도는 이내 불가함을 깨닫는다. 아빠에 대한 경쟁심은 이내 동질감으로 바뀌고, 남아는 아빠로부터 규율을 배우게 된다. 아빠처럼 되면 엄마와 같은 여성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여아는 남아와 미러링 된다. 엄마에 대한 경쟁심은 동질감으로 바뀌어, 엄마처럼 되면 아빠와 같은 남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를 각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부른다.


중요한 지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억압되는 이유다. 그 이유는, 남아가 엄마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빠로부터 남근이 잘릴 거라는 근원적 공포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이 이미 잘린 사람이 바로 여성이라고, 남아는 생각한다. 남근이 잘린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 남아는 엄마를 포기하고 아빠의 질서를 받아들인다. 이것을 거세 콤플렉스라 한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이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극복되며 그와 동시에 반대 성의 부모를 욕망했던 그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억압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유아 시절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단 한 순간의 기억조차도 말이다. 간혹 아기 때 기억이 난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자신의 진짜 기억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주입되어 만들어진 가짜 기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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