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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22. 2020

5-09.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은 마음

죽음충동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의 이론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참전 용사들의 PTSD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욕구는 성충동으로서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표출 방식으로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인데, 참전 용사들은 모순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불쾌를 주는 전쟁 당시의 끔찍한 참사를 정신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했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동안 고통스러워하고 못 견뎌 하면서도 그들은 같은 회상을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구조에는 성충동 못지않은 또 다른 근원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프로이트는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그것을 ‘죽음 충동’이라 불렀다. 말 그대로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생명체는 살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죽음 충동은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일부 주류 프로이트학파에서는 아예 죽음 충동을 프로이트 이론의 오류라 생각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죽음 충동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계속해서 프로이트의 생각을 따라가자.


처음에는 죽음 충동을 파괴나 공격성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회귀’로 파악했다. 모든 생명체의 시작은 무생물이다. 물질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역사를 단순화하면 무생물에서 태어나 다시 무생물로 돌아가는 궤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모든 생명 개체의 근본적인 욕망은 무생물로 회귀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은 프로이트가 줄곧 가져왔던 인간의 정신구조에 대한 기본 전제와도 부합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려 한다. 불쾌는 갈등에서 온다. 그런데 삶은 늘 갈등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체가 추구하는 쾌락은 늘 지연되거나 억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불쾌를 줄이기 위해 갈등을 피하려 한다. 근본적으로 갈등을 없애는 방법은, 삶을 종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갈등을 피하고 불쾌를 줄이기 위해 죽음으로 향한다.


죽음 충동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변신하면서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탈바꿈한다. 그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선 그의 이론이 어떻게 변신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이전까지 프로이트는 정신을 무의식-전의식-의식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니 조금씩 문제가 생겼다. 무의식·전의식·의식은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로서의 개념이 강하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정신은 역동적인 주체에 가까웠다. 쾌락을 추구하고, 그걸 또 억압하고, 그 억압을 다시 회피하여 우회적으로 쾌락을 성취하려는 게 정신이다. 그런데 무의식이나 전의식 같은 저장소가 주체가 되어 작업을 수행한다는 건 일관된 해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쾌락을 추구하는 곳이 무의식이기만 한 건 아니며, 그것은 의식적인 차원에서도 수행된다. 억압 또한 마찬가지다. 억압이 전의식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이나 의식적 차원에서도 행해진다. 무의식 전의식 의식 모두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쾌락을 억압하기도 한다. 정신의 작업들이 어떤 특정 공간과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전면 수정했다. 그 결과가 정신 구조를 이드-자아-초자아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많은 이들이 이드=무의식, 자아=의식, 초자아=전의식이라는 식으로 짝을 지어 이해하고 또 설명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드는 충동을 추구하려는 주체다. 자아는 이드의 충동을 현실에서 성취시켜주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 주체다.


물론 자아는 늘 이드의 충동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않는다). 이드의 충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사회적으로 금지될 때, 자아는 그 충동을 우회적으로 실현할 방법을 찾는다. 초자아는 이드의 충동이 사회적으로 금지될 때 그것을 억압하는 주체다. 이드는 생래적으로 형성되는 반면, 초자아는 외부의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하여 사후적으로 생성된다. 자아는 이드와 외부세계 사이의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를 중재한다.


이렇게 바뀐 이론에서,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과 함께 고민한 건 초자아의 가학성이었다. 초자아는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한다. 이드의 충동을 충족시키려는 자아의 노력과 시도를, 초자아는 억압하고 처벌하려 한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자아에 대한 초자아의 처벌이 초자아가 지닌 일방적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그 생각은 바뀐다. 초자아의 처벌은 자아의 전략이었다고 말이다. 자아는 초자아의 처벌을 받기 때문에 비로소 이드의 충동을 실현시킬 명분을 얻게 된다. 그것이 자아가 이드의 충동을 충족시키는 우회적인 방법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먼저 초자아에게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아주 은밀하게. 이드는 자아가 초자아의 처벌을 받든 말든 무조건 충동을 실현시키길 바란다.


그러한 생각의 전환은, 죽음 충동을 이해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죽음 충동은 단순히 무생물로 회귀하려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상을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본능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정신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 전에 공격당하고 파괴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마치 자아가 초자아에게 처벌받고 싶어하듯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공격성과 파괴 욕구는 타자를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향한다. 그것이 죽음 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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