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식이란 무엇인가
성인의 성추행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신경증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성인이 자신을 성추행했다는 아이의 환상이 신경증을 일으킨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아에게도 성충동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확장판이다. 남아는 엄마를, 여아는 아빠를 욕망하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행동 또한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아이가 투사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역겹고 견디기 힘들었는데, 모든 아기에게 보편적으로 성충동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해석을 사람들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덕분에 프로이트는 더 많은 비난과 논란에 휩싸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이론은 많은 왜곡된 호기심과 오해로 인해 잘못된 이미지를 형성한 듯하다.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기가 부모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거듭 말하건대 아기는 성(性)의 의미를 모르며 따라서 성관계를 모른다. 아기가 가진 성충동이란 ‘본원적인 쾌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아가 엄마를 욕망한다는 건, 영원히 자신이 원할 때마다 엄마로부터 쾌락을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자신이 원하면 젖을 먹을 수 있고 엄마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보장 말이다. 여아 또한 마찬가지다. 프로이트에 대한 한 가지 오해는, 이미 성의 의미를 알고 있는 성인의 눈으로 아기를 역투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프로이트에 대한 변명은 이쯤 하고. 그렇다면 신경증 환자를 실제로 어떻게 치료하는지 성공적인 사례 하나만 살펴보자. 형부를 사랑한 엘리자베스의 사례다. 엘리자베스는 이유도 없이 다리에 마비가 와서 프로이트를 찾은 환자다. 분석 결과 그녀가 형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녀가 최근에 형부와 단둘이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단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쾌락을 느꼈으나 그 쾌락은 금지되어야 하므로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처벌을 내림과 동시에 형부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으로 억압했다.
그 처벌이란 형부와 산책하며 쾌락을 안겨준 자신의 다리를 마비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두 번 다시 형부와 산책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프로이트로부터 분석 내용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강하게 부인했다. 프로이트가 엘리자베스에게 이어서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은 그 누구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며 그 감정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오히려 자신의 다리를 마비시킴으로써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는 것이, 엘리자베스가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이며, 만약 부도덕하고 문란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마비 증세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인 후 형부와 닮은 다른 남자와 교제하고, 신경증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처럼, 프로이트의 치료는 단순히 감정을 발산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고양시키는 것이 목표다. 그래야 앞으로 새로운 억압이 발생할 때 스스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제시한 정신구조에는 무의식과 의식 말고 한 가지 개념이 더 있다. ‘전의식’이다.
억압되어 망각된 기억의 저장소가 무의식이고, 기억하고 인지하는 정신 세계가 의식이라면, 전의식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우선 망각된 기억이 한 종류가 아님을 간파했다. 이미 망각됐다는 것조차 모르는 기억(=전자)이 있다면, 망각됐음을 알고 있는 기억(=후자)이 있다. 후자는 기억을 쥐어짜내거나 어떤 스파크를 접하면 잊혔던 기억이 금방 떠오른다. 혹은 어느 날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그 두 가지 망각이 모두 같은 무의식에 있다는 걸 프로이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전자의 기억이 무의식에, 후자의 기억이 전의식에 저장되었다고 설정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거다. 기억을 억압한다는 건 검열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기억을 의식에 둬도 될지 무의식에 넣어야 할지 말이다. 반대로 무의식에 있는 내용이 의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때도 그 내용을 의식으로 꺼내도 될지 안 될지 검열하는 작업이 우선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검열은 어디서 이루어질까.
당연히 무의식은 아니다. 무의식은 억압된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이자 본능적 충동 에너지(=리비도)가 담긴 저장소다. 그런 곳이 복잡한 장신 작용을 수행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의식이 검열 작업을 행할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 의식이 검열을 통해 기억을 억압하고 무의식에 넣는다면, 망각된 내용은 기억 못하더라도 검열 과정과 억압 자체는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을 다시 의식으로 방출할지를 검열하는 과정 또한 의식이 행한다면, 방출하기도 전에 이미 무의식의 기억을 검열과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기억을 검열하여 억압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작업하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전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