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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27. 2020

5-10. 문명과 사랑은 반비례 관계

문명과 성충동과 죽음 충동의 변증법

죽음 충동은 성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죽음 충동은 성충동에 종속된 개념이 아니라 성충동과 같은 레벨의 독립적인 충동이다. 왜냐하면 죽음 충동은 자아와 초자아의 기원과 결부된 본원적인 충동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초자아의 형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동일시는 인간 정신이 지닌 선천적인 기능 중 하나다. 자아와 초자아는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 자아는 지각에 따른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한 결과다. 18개월 미만의 아기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의 신체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과 비(非)-자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라는 대상과 외부 대상 사이의 구분 기준이 아기의 정신에는 들어있지 않다.


대략 18개월 이후의 아기들은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의 신체임을 인지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신체를 자기라고 인지한다는 뜻이다. 보고 만지고 물고 빨며 자신의 팔다리와 몸을 지각하면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정신에 투영된다.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자아는 신체에 대한 이미지를 동일시한 결과다.


초자아는 아버지를 동일시한 결과다(남아 기준. 여아의 경우 프로이트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유아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는 건, 미래에 자신도 아버지처럼 되어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내포한다. ‘미래에’ 아버지처럼 된다는 건 ‘지금은’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의 유아는 아버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초자아는 ‘금지’와 함께 탄생한다.


성취하려는 자아와 억압하려는 초자아, 혹은 억압받고 싶어하는 자아와 성취를 막고 싶은 초자아의 관계는 둘의 출생 기원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죽음 충동은 성충동에 종속된 하위 개념이 아니다. 성충동이 이드가 지닌 생래적인 본성이라면, 죽음 충동은 자아와 초자아가 형성되면서부터 가지는 시원(始原)의 본성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할수록 죽음 충동이 강해지고, 성충동은 약화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문명의 형성 과정부터 살펴보자. 정신분석학적으로 문명에 접근하면 한 가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질문인데, 여기서는 ‘초자아가 먼저냐 외압이 먼저냐’로 바뀐다. 왜냐하면 초자아는 사회적 금기의 내면화이기 때문이다. 초자아는 애초에 금기가 없었다면 탄생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금기의 기원은 무엇인가. 금기는 아버지의 규율이다. 쉽게 말해 아버지의 초자아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누구로부터 억압당했을까. 이런 식으로 질문이 꼬리를 물면 끝이 없다. 태초의 인간은 누구로부터 금지의 명령을 받았을까.


이때 프로이트는 한 가지 사고실험을 강행한다. 아주 먼 옛날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 한 명이 여자들을 다 차지했고, 그의 아들들은 여자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여자들을 나누어 가지기로 모의한다. 그 계획은 성공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여자를 나눠 가진 것은, 죽음 충동과 성충동의 표출이다. 하지만 곧 아들들은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죗값으로 아버지를 기리는 제의를 마련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사람을 죽이는 짓은 저지르지 않기로 규칙을 만든다. 이것이 금기의 시작이자 문명의 기원이다. 이제 사람들은 성충동과 죽음 충동을 함부러 표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규칙은 두터워지고 엄격해진다. 그 말은, 문명이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진다는 뜻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 성충동과 죽음 충동을 드러내는 것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다. 그런 사람은 반사회적이라고 낙인 찍힌다. 인간의 삶은 성충동과 죽음 충동이 조화를 이뤄야 건강해지는데,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두 충동을 억누르게 만든다.


성충동이 억눌린 결과가 19세기 유럽의 히스테리였다. 그것이 프로이트의 진단이다. 성충동이 억눌리면 죽음 충동이 더욱 커진다. 그런데 그러한 죽음 충동마저도 문명은 자꾸만 찍어내린다. 자신을 향한 죽음 충동이 은밀하게 외부로 향할 때 그것은 폭력으로 표출된다. 범죄 또는 전쟁 등으로 말이다. 온 사회가 죽음 충동을 억누른 결과 터져나온 것이 20세기 초의 1차 세계대전이었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필연적인 수순이라 여겼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성충동이 억눌리고, 그 틈을 타 죽음 충동은 증폭한다. 그런데 문명은 죽음 충동마저 억누르니, 갈 곳 잃은 죽음 충동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 문명 발전을 멈추고 자연 상태로 회귀해야 하는 것인가. 프로이트는 그 질문과 답을 동시에 루소에게서 배웠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답변 또한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문명 속에서 건전하게 성충동을 충족시킬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말년에 프로이트가 모색하던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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