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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24. 2020

7-05. 고양이의 생사가 걸린 문제

코펜하겐 해석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중슬릿 실험을 비롯한 양자역학적 우주에 대해 20세기에 가장 많이 사랑받은 관점은 코펜하겐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에 대한 표준해석으로도 불린다.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을 필두로 한 여러 물리학자들의 다중지성적인 해석의 집합체로, 단일한 세계관이 아니며 세부적으로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적어도 코펜하겐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점이 존재한다.


첫째, 빛과 전자를 비롯한 미시세계의 대상이 입자로서의 성질과 파동으로서의 성질 둘 다 가진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를 ‘상보성’이라 한다. 상식적으로 모순인 이 이중성을 코펜하겐 학파는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들은 모두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혹자들은 입자 혹은 파동이라는 건 어떤 본질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시각적 한계로 인해 동전의 앞면 또는 뒷면만 볼 수 있는데, 그 앞면과 뒷면이 각각 입자와 파동으로 비유되는 셈이다. 앞면도 뒷면도 동전 자체의 모습이 아니듯 입자도 파동도 물질 자체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거다.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근원적인 실체가 있다고 그들은 상상한다.


둘째, 전자 등의 물질은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 존재하고 관찰하면 입자로 나타난다. 여기서 관찰을 ‘본다’라는 일상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물리학에서 ‘관찰’이라는 개념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논쟁적이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대략적으로 밝히자면 관찰이란, 대상이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일체의 현상을 일컫는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운동에 전혀 개입받지 않은 경우에 전자는 파동에서만 나타나는 간섭무늬를 보인 반면, 슬릿과 스크린 사이에 카메라를 설치해 ‘관찰’당한 경우에는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입자처럼 행동한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해석으로서 실험에 대한 사후적인 판단일 뿐, 이 해석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셋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다. 대상에 속한 연관된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 측정을 위해서는 전자기파(=빛)를 대상에 쏘아야 한다.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싶다면 전자기파의 파장이 최대한 짧아야 한다. 위치를 측정한다는 건 발사한 전자기파가 어느 위치에서 대상과 충돌했는지를 알아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파장이 짧을수록 위치 범위의 최댓값을 좁힐 수 있다.


그런데 파장이 짧다는 건 진동수가 높다는 걸 의미한다.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커지기 때문에, 발사한 전자기파에 부딪힌 대상은 높은 에너지로 인해 운동이 크게 변한다. 따라서 정확한 운동량을 측정할 수 없다. 반면 대상의 운동량을 정밀하게 측정하려면 에너지가 낮은 전자기파를 쏴서 대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파장이 매우 넓은 저주파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파장이 넓은 만큼 정확한 대상의 위치를 밝혀내기 어렵다.


코펜하겐 해석이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환영받은 건 아니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고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였다. 아인슈타인의 불만에 대해서는 조금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당장 슈뢰딩거의 불평을 먼저 들어보자.


미시세계의 대상이 파동과 입자로서의 이중성을 지닌다면 거시세계에서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책상 위의 머그컵과 모니터도, 지구 자체도, 아니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미시입자들의 결합으로 구성돼 있다. 전자와 원자가 이중성을 지닌다면 그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질 또한 이중성을 지녀야 일관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 한 번도 큰 물체가 파동으로 존재하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시세계의 물체는 늘 입자로 존재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상보성과 이중성을 믿을 수 없던 슈뢰딩거가 제시한 사고실험이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상자 안에 전자 한 알과 입자탐지기와 독약과 고양이를 넣고 문을 닫아 밀폐시킨다. 입자탐지기는 상자 전체가 아니라 상자 안의 특정 지점만 탐지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전자가 탐지되면 독약이 새어 나와 고양이는 죽게 된다. 한 알의 전자는 관찰당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상자 전체에 걸쳐 파동으로 존재할 것이다. 입자탐지기의 탐지 공간 범위에서 전자가 입자로 나타날 확률을 p라고 가정하면 고양이가 죽을 확률도 p가 된다.


반대로 말하면, 입자탐지기가 커버하지 않는 이외의 공간에서 전자가 입자로 나타나 독약이 나오지 않고 고양이가 살 확률은 1-p이다. 전자가 어디서 입자로 나타날지는 문을 열고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알 수 없다’는 표현은 관측자의 무지에 기인하는 게 아니다. 이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상자 문을 열고 관찰하기 전까지 전자는 파동인 채로 상자 전체를 가득 채울 것이므로 관찰되는 순간 전자가 어느 위치에서 입자로 나타날지는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을 열기 전까지 상자 안은 전자가 입자탐지기에 탐지될지 안 될지 두 가지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다. 문을 열고 관찰하는 순간 전자는 특정 위치에 입자로 나타날 것이다. 그 순간 고양이가 살지 죽을지 결정된다.


전자가 파동인 채로 존재한다는 것은, 전자가 입자탐지기에 탐지되거나 되지 않는 두 가지 현상이 확률적으로 중첩된 상태라는 것과 등치다. 그 뜻은, 문을 열기 전 상자 속 상태는, 독약이 나와서 고양이가 죽은 상황과 독약이 안 나와서 고양이가 산 상황이 각각의 확률로 중첩된 채 존재한다는 것과도 등치다. 그런데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확률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이 대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이 고양이 사고실험을 통해 슈뢰딩거가 묻고 싶었던 바다. 슈뢰딩거의 결론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코펜하겐 해석이 우주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슈뢰딩거의 반증이자 조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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