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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01. 2020

7-09.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양자역학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

뉴턴 역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된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단 한 알도 예외없이 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 뉴턴 역학의 세계관이다. 인간의 신체 또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뇌도 마찬가지이다. ‘영혼’이라는 비물질적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이란 뇌를 비롯한 신경세포의 작용/기능이다. 인간의 신경세포도 당연히 물질의 집합이라면, 신경세포의 작동 또한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100%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다만 인간이 그 작동 원리와 변수를 정확히 모를 뿐이다.


근대 과학자들은 위와 같은 생각을 속으로는 했지만 겉으로는 표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필요한 공식을 도출하고 검증하고 활용하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떠넘겨졌고, 과학자들은 모른 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양자역학이 연구되면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양자역학이 지닌 신비로움 탓인지, 현대 물리학자들의 호기로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과학자들도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명한다. 뉴턴 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자유의지가 작동할 틈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첫째, 관찰자가 미시세계의 대상을 내버려두면 그것은 파동으로 존재하고, 관찰하면 입자로 존재한다. 그 말은 관찰자가 미시세계 대상의 존재 양태를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작용에 대한 독립변수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가 된다. 그리고 관찰자는 관찰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은 논쟁적이며 따라서 반론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인간의 관찰 행위 자체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거 사건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입장이다. 대상을 관찰하고 나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관찰하지 말 걸 그랬네, 안 그랬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결과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예상은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결론은, 관찰자가 관찰할지 말지 선택하는 것도 관찰자의 주관이 아니라 우주라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관점이다.


이걸로 자유의지가 무너졌다고 슬퍼하기엔 이르다. 둘째는 파동함수의 붕괴(=파동이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나는 현상)가 임의적이고 확률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상자 안에 전자 한 알이 있다고 가정하자. 관찰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자는 상자 안에 가득 퍼진 파동의 상태로 존재한다. 관찰하는 순간 특정 지점에 입자로서 나타난다. 정확히 어느 위치에서 입자로 수렴할지는 파동함수를 통해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왜 하필 이 위치에 나타났냐는 거다. 예를 들어 파동함수에 의하면 이 위치에 입자로 나타날 확률은 10%인데, 결과적으로 이곳에 입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하자. 왜 우주는 나머지 90% 확률을 제외하고 이 확률을 택했어야 했을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다시 설명하자면, 상자를 여는 순간 고양이가 살 확률이 p, 죽을 확률이 1-p인데 왜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로 귀결됐을까, 하는 의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데이비드 봄은 이 문제를 ‘다세계 해석’으로 해결하려 했다. 전자를 관찰하는 순간, 입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위치의 버전 수만큼 평행우주가 분할된다. 다만 지금의 관찰자는 ‘이곳’에서 전자를 발견하게 되는 우주에 속하게 된 거다. 다른 우주에서는 관찰자들이 똑같이, 왜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서 전자가 발견됐냐며 투덜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결론은 이거다. 미시세계에서는 대상이 어느 위치에서 입자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수학적으로는 확률적이며 따라서 임의적이다. 적어도 뉴턴 역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정론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의지의 가능성과 무슨 상관인가. 일부 뇌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뇌가, 그러니까 뇌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에서는 양자역학적인 현상이 벌어진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시냅스의 크기가 나노미터 단위이므로 충분히 미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경세포 시냅스에서의 전자기적 작용이 양자역학을 따르기 때문에 임의적이며 따라서 결정론적인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의적인 것을 자유의지라고 말할 순 없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행위 주체의 주관이 뚜렷하게 개입되는 것을 일컫는데, 신경의 작용이 임의적이라면 우리의 선택도 임의적이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삶이 숙명처럼 다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위로는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희망이 될 수도 없다.


이 지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에 관한 쟁점을 소개하는 것이지 모종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현대 물리학자들이나 뇌과학자들도 저마다의 입장이 첨예하게 다르며 아직까지 이렇다 할 합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결론은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자유의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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