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과 정상과학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쿤의 답변은 독특하다. 쿤은 패러다임이 있으면 과학, 없으면 과학이 아니라고 답한다. 패러다임이란 학자들끼리 공유하는 가치 체계와 세계관 등을 총망라한 집합체이기도 하고, 어떠한 대상을 설명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본(本)를 일컫기도 한다. 학문을 직소퍼즐에 비유한다면, 패러다임이라는 건 학자들이 모두 똑같이 믿는 공통의 직소퍼즐판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동일한 하나의 퍼즐판을 붙들고 서로 여기저기 조각을 맞춰나간다. 반면 타 학문의 학자들은 서로 각자의 퍼즐판을 붙들고 혼자서(혹은 같은 학파끼리) 직소퍼즐을 완성하려 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는, 신고전학파가 가진 경제상의 퍼즐판과 포스트케인즈학파가 가진 퍼즐판이 전혀 다르며, 그들은 서로 자신의 퍼즐판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며 논쟁한다.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인지심리학자와 뇌과학자, 행동주의학파가 가진 퍼즐판은 제각각 다르며 그들끼리도 서로 자신의 퍼즐판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물리학에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믿지 않으면 주류가 될 수 없다. 화학에서 원소모형을 믿지 않으면, 생명과학에서 유전자와 진화론을 믿지 않으면, 역시 외롭고 괴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쿤에게도,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창조론 등은 과학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자들끼리 공유하는 하나의 동일한 퍼즐판은 없다. 프로이트와 융과 아들러는 서로 자기 퍼즐판이 옳다고 싸우고 헐뜯다 영원히 이별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이상적인 퍼즐판은 없다. 각자 자신의 퍼즐판이 진짜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상주의 사회라고 주장할 뿐이다. 창조론 또한 마찬가지다. 성서에 나온 창조론 관련 문장은 몇 자 안 되며, 그것을 해석하는 각자의 학파가 존재하며 각 학파의 이론은 공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오직 하나의 퍼즐판을 붙들고 조각을 맞추며 씨름해 왔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대마다 과학자들이 공유한 퍼즐판은 전혀 달랐다. 가령 중세의 천체학자들은 천동설, 근세에는 지동설이라는 서로 상이한 퍼즐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퍼즐판은 바뀐다. 각 퍼즐판 사이의 연결고리가 없으므로 퍼즐판이 바뀌는 과정은 연속적이지 않고 단절적이다. 이를 쿤은 ‘과학혁명’이라 불렀다. 반대로, 하나의 퍼즐판이 계속 유지되는 시기를 ‘정상과학’이라 칭했다.
쿤이 지적하고자 한 점은, 이전 퍼즐판에서 다음 퍼즐판으로 교체되는 과정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합리적이지 않으며, 최근 퍼즐판이 과거의 퍼즐판보다 더 우수하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원자모형으로, 뉴턴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한다. 또한 후자의 이론이 전자보다 더 사실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쿤은 그것을 과거의 과학 이론들을 재점검하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비록 자신은 20세기에 몸을 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면 정말 그렇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천동설의 렌즈로 우주를 보면 정말 천동설이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우리는 지동설을 믿기 때문에 천동설의 세계관을 보면 한심하고 우스워 보인다.
천동설의 문제점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행성이 어느 날 갑자기 역행하더라는 것이다. 왜 계속 전진하던 화성이 어느 시기에는 후진하다가 다시 전진할까. 고민하던 학자들은 ‘주전원’이라는 획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행성의 공전 궤도 안에 또 다른 작은 공전 궤도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주전원이다. 행성이 크게는 넓은 원의 궤도를 도는데, 그 과정에 다시 작은 원의 궤도를 주기적으로 돌면서 움직인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어느 시기에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행성의 움직임이 설명된다.
그런 식으로 천동설에서는 태양계 전체에 80여 개의 주전원을 집어넣게 된다. 반면 지동설은 주전원이라는 개념 없이 행성의 역주행을 설명할 수 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주전원을 집어넣은 건 반칙이라거나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전원을 넣은 천동설 모델의 설명력과 예측력이 지동설보다 훨씬 우위였다는 점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택한 이유는, 이론의 단순함 때문이다.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신학자 윌리엄 오컴 이후 사람들은 단순할수록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관념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게 완벽하다는 건 하나의 도그마일 뿐, 그것을 증명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그 또한 하나의 믿음일 뿐이다. 현재의 과학자들도 이론은 단순할수록 진리에 가까울 것이라는 미신(?)을 지니고 있다.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유전자를, 쿼크를, 전자기력과 강력과 약력을 발견하게 했다.
기존의 퍼즐판을 버리고 새로운 퍼즐판을 취하게 만드는 건,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과학자 집단의 심리적 편향 때문이다. 핵심은 이거다. 과학이란, 밖에서 보기에는 객관적 데이터로 축적된 진리 체계처럼 간주되겠지만, 내부에서 보면 과학자들의 합의 체계라고 말이다. 그것이 진리여서 진리인 게 아니라,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을 진리로 보이게끔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