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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pr 25. 2021

05. 서양 철학 2

국가론

서양철학에서 내가 택한 두 번째 주제는 ‘국가론’이다. 국가론은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좋은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고민과 답변을 주제로 한다. 여기서는 5명의 철학자를 다루겠다. 시대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2명과 3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들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로크·루소이다. 우선 플라톤부터 살펴보자.


플라톤에게 중요한 건 과연 ‘누가’ 사회를 통치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똑똑한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정치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장 좋은 통치는, 현실 사회를 이상 사회에 가장 가깝게 다스리는 걸 일컫는다. 이상 사회의 본(本)은 이데아 세계에 있는데, 모든 인간은 이데아 세계에 있다가 현실 세계로 넘어오면서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이데아 세계에서의 모든 이상형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지적인 훈련을 통해 잊어버린 이상세계의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 세계관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걸 상기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소수의 지성인들만이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그 능력이 선천적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영혼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금의 영혼, 은의 영혼, 동의 영혼이다. 금의 영혼을 지닌 사람만이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깨칠 수 있고 따라서 통치자가 될 수 있다. 은이나 동의 영혼을 가진 이들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플라톤은 금과 은과 동의 영혼에겐 저마다의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금의 영혼이 통치자가 되면, 은의 영혼은 군인이 되고, 동의 영혼은 자유인이 되어 농업이나 상업 활동을 하면 된다. 각자의 영혼은 각자의 역할에 특화되어 있을 뿐 어느 영혼이 더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금의 영혼을 가진 자는 통치를 하는 대신 경제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심지어 통치자는 사적 재산을 소유해서도 안 된다. 반면 동의 영혼을 가진 자는 통치에 참여할 수 없는 대신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사적 재산을 마음껏 소유할 수 있다. 이 대목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점을 주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이 무한정의 경제력까지 지니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빛깔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때 플라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을 공적으로 다루자는 것이다, 우선, 플라톤이 보기에 가족이라는 제도는 굉장히 비합리적이었다. 보통의 왕의 아들은 왕으로부터 통치권을 물려받아 다음 왕이 되기 마련이다. 상인의 아들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되고, 장군의 아들 또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는 루틴을 따른다.


하지만 금의 영혼에게서 반드시 금의 영혼만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각 빛깔의 영혼이 어느 집안에 태어날지는 전적으로 임의적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영혼을 무시한 채 가문이라는 관습과 전통에 입각하여 사회적 역할을 분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망가뜨리는 비합리적 악습이다. 플라톤은 가문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오직 영혼의 빛깔에 따라서만 사회적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은 반드시 각 가정이나 개인교사가 행하지 말고, 국가(정확히는 ‘폴리스’)에서 배정한 교육전문가가 공적으로 균등하게 행해야 한다.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 아기는 곧바로 공공탁아소에 맡겨진다. 부모는 아기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으며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의’ 자식이라는 인식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히 가족은 형성되지 않는다. 공공탁아소에 맡겨진 아기들은 대략 5세 정도까지 전문가들에게 공동 양육된다. 플라톤은 그때쯤 되면 대략 영혼의 빛깔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의 영혼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 아기들을 따로 모아 성인이 될 때까지 엘리트 교육을 시킨다. 마지막에 최종 1인을 엄선하여 그를 통치자의 자리에 앉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가’ 통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스승인 플라톤이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이미 5가지 통치 방식을 정리한 바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다시 체계화하여 6가지(3×2)로 나누었다. 우선 1명이 통치하는 방식, 여러 명이 통치하는 방식, 모두가 통치하는 방식, 이렇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는 통치가 잘 이루어질 때의 버전을 말하는 것으로, 반대로 말하면 통치가 악화될 때의 버전도 있다는 말이다. 세 통치의 나쁜 버전은 각각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이라 칭한다.


이처럼 누가 통치하든 상관없이 잘하면 좋고 못하면 나쁘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금의 영혼을 지닌 가장 지적인 자 1인이 통치하는 군주정을 옹호하는 스승의 생각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누가 통치하든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건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였다. ‘어떻게’ 통치해야 군주정·귀족정·공화정이 참주정·과두정·민주정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의 화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명언은 이것일 것이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저 문장의 의미를 뜯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간략히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만물에는 목적이 있다고 여겼다. 후대 사람들이 ‘목적론’이라 부르는 세계관이다. 가령 플루트의 목적은? 연주다. 그렇다면 플루트를 누구에게 분배하는 것이 좋을까? 플루트 연주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에게 주는 것이다. 모든 대상의 목적을 가장 잘 구현해내는 세상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겐 가장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걸 알려면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언어’다. 언어는 무엇을 위한 특성일까? 소통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소통할까? 서로의 인간됨을 고양시켜 모두가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이 바로 ‘정치’다. 언어는 정치를 위한 수단이고, 정치는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다. 지금이야 정치라 하면, 경제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까를 논의하는 장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하는 장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경제 활동은 철저히 사적 영역이었으므로 다른 사람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리를 어떻게 감으면 좋을지를 토의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날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세금을 얼마나 어떻게 걷고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를 논의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고대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 볼 수 있겠다.


서로에게 좋은 삶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인간들은 어떤 언어활동을 통해 어떤 정치를 해야 할까?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꺼낸 카드는 두 장인데, ‘우애’와 ‘정의’다. 이를 이해하기 전에 우선 고대 그리스 사회 또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때에도 귀족이 있었고 평민인 자유인이 있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자유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자유인들은 그러한 귀족들을 재수없어 했다. ‘우애’란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게 만드는 언어활동 전반을 일컫는 개념으로, 주로 같은 신분인 사람들 간에 통하는 덕목이었다. 내가 귀족이라면 당연히 다른 귀족들이 신분에 맞게 고귀한 삶을 살기를 바랄 것이며, 그들에게 그러한 조언과 언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유인이라면 다른 자유인들 또한 귀족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당당한 삶을 살기를 원할 것이기에, 같은 자유인끼리의 연대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문제는 귀족과 자유인 사이의 유대이다.


이때 필요한 덕목이 바로 ‘정의’다. 정의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고/언어활동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내가 선한 삶을 사는 바람직한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신분이어도 그에 대한 역겨움/재수없음을 극복하고 그도 좋은 삶을 살도록 도모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를 지키는 것이 혼자서는 힘들지 몰라도 모두가 소통을 통해 서로를 고무시킨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대단히 추상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이걸로는 논의가 부족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마지막인 10권은 이렇게 끝난다. 이제부터 함께 좋은 정치에 대해 논하자고 말이다. 황당한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개성이 언어활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정치가 가능하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좋은 정치’란,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험적으로 정해진 진리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폴리스의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합의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함께 논의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마지막 결론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 시간을 1800 여 년을 건너뛰어 토마스 홉스를 만날 차례다. 여기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논의의 결이 사뭇 달라진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인이었다면, 홉스·로크·루소는 우리와 같은 근대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생각은 상대적으로 친숙할 것이다.


홉스가 전제한 인간관은 냉혹하다. 인간은 모두 살고 싶어하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그것이 논의의 시작이다. 국가와 인간 중 인간이 먼저일 것이므로 우리는 국가가 없는 인간만 존재하는 원시 세계를 가정할 수 있다. 국가가 없을 때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게 홉스의 정확한 워딩이었다. 왜냐하면 n명이 있으면 그 n명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면야 괜찮지만, 문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이 타인의 이익 추구를 방해하거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이다. 그때도 인간은 자신의 이익 추구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 이익의 타인의 손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전쟁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다행히 홉스가 가정한 또 한 가지는,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그대로 살다가는 자기 이익은커녕 생존도 장담하지 못하고 파멸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들은 꾀를 내어 개인 간 갈등을 해결해줄 심판자를 선발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 심판이 모든 개인에게 개입할 수 있으려면 모든 개인의 기본권을 위임받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개인은 기본권의 일부분을 1명의 심판에게 똑같이 위임하기로 합의한다. 이것이 ‘사회계약설’이다. 그리고 그 심판이 바로 왕이다. 왕은 모든 개인의 기본권의 일부를 양도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모든 개인에 간섭하고 제지할 수 있다.


이제 제3의 심판자가 생겼으니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울까?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왕 또한 인간인지라 그도 자기 이익 추구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인 수순은 독재이다. 왕은 이제 모두로부터 물려받은 기본권의 조각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집어치우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다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사회에 n명이 있다면 n-1명이 나에게 적이라는 말이다. 독재의 경우 1명만 나의 적이다. 그러니 국가가 없는 원시사회보다 왕이 독재하는 사회가 더 낫다는 것이 홉스의 결론이다.


당연히 위 결론은 만족스럽지 않다. 로크 또한 그랬다. 그는 독재를 내버려두다 못해 찬양(?)하는 듯한 홉스의 이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서 인식론 때도 그랬듯 로크의 필살기는 이분화하기다. 그는 사회계약도 2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개인들의 권리를 일부 양도하여 주권자를 추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주권자로 누구를 선발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계약은 파기할 수 없지만 두 번째 계약은 되돌릴 수 있다는 게 관건이다. 그러니까 주권자 자체를 없애고 과거의 자연상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현재의 주권자로부터 이전에 주었던 기본권을 되돌려받고 그를 일반인 신분으로 되돌리는 건 가능하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로크는 홉스와는 다른 인간관을 전제했다. 인간은 당연히 자기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건 맞지만, 그에 못지않게 평화를 원한다고 말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폭력적인 상황을 가장 싫어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과정에서 원치 않은 폭력이 발생한다면 인간은 자기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그 폭력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홉스와 달리 로크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평화 상태이다.


그렇다면 로크는 왜 굳이, 사람들이 자신의 기본권 일부를 양도하면서까지 주권자를 선발하려 한다고 생각했을까. 예외 상태 때문이다. 항상 평화가 유지되면 좋겠지만, 일부 타락한 개인은 폭력과 전쟁을 마다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평화로운 상태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말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항시 지닐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폭력의 싹을 자르기 위해 인간은 기본권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주권자를 추대한다는 게 로크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주권자가 독재를 저지른다면 그건 자연상태보다 못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로크는 ‘저항권’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루소는 홉스와 로크의 논의가 자기모순적이라고 느꼈다. 홉스와 로크의 공통점은, 각 개인의 의사와 왕의 의사가 반(反)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이 루소가 느낀 모순점이었다. 애초에 왕(=주권자)이 휘두르는 권력이 각 개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본권에서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의사(意思)의 이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각 개인 --> 왕 --> 다시 개인. 왕은 결국 각 개인의 의사를 대행하는 대리자일 뿐이다. 각 개인들은 왕을 시켜서 자신들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므로, 결국 왕의 다스림은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쉬운 예를 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하기 싫어한다. 그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학원에 등록한다. 중고등학생이라는 교과목 학원을, 대학생이나 성인이라면 어학원 등을. 그런데 학원 숙제도 많고 매번 학원에 가서 수업 듣는 게 힘들고 지겨울 때가 있다. 오늘은 학원 쉴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때 나의 의사와 학원의 의사는 부딪히는 걸까. 홉스와 로크의 말대로라면 그렇다. 그런데 루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학원선생이 등록한 학생에게 수업하고 숙제를 내는 건, 선생 개인의 의지가 아니다. 그는 학생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 일을 학생 대신 하도록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세 사람에게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 이때 홉스라면, 그래도 학원을 계속 다니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학원에 안 다녀서 맨날 노는 것보다는 학원에 다니면서 억지로라도 수업 듣고 숙제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이다. 로크는 다른 학원을 알아보라고 이른다.


루소는 그것이 학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문제라고 말한다. 애초에 그 학원이 어떤 시스템을 갖췄고 어떻게 수업하고 과제량이 많은지 등을 미리 조사하지 못한 학생 본인의 문제라고 말이다. 혹은 그걸 다 알아본 다음에 등록했음에도 힘들어한다면 그건 학생 본인의 게으름과 의지의 문제라고. 개인과 주권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권자를 추대한 건 모든 개인의 합의에 따른 것이지, 주권자 개인의 강압이나 폭력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주권자는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주권자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와 반한다고 주장하며, 주권자를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것을 주권자의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로크의 말대로 기존 주권자의 권한을 박탈하고 새로운 주권자를 선출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루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이 개인들에게 있으니 다른 어떤 주권자를 선발해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루소의 주장이 더 와닿을 것이다. 대통령만 바뀌면 사회가 달라질까. 5년에 한 번, 4년에 한 번 있는 투표에만 참여하면 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십 수 번 바뀌어도 문제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루소의 일침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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