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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ug 14. 2019

07. 정치 철학 1

공리주의의 성립 배경과 한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를 설명할 때 늘 나오는 말이다. 공리주의는 그 명칭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사는데, ‘공’을 공공, 즉 public이라고들 많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리주의의 공은 共이 아니라 公이다. 공리란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드러난 이익을 뜻한다. 이는 애초에 잘못된 번역 탓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공리주의가 아니라 효용주의라고 번역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영어로는 utilitarianism이다. utility를 기준으로 삼는 이념이란 뜻이다.


공리주의란 쉽게 말해 해당 사안에 관여되는 사람들 전체의 이익이 가장 커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고 입증하는 이론이다. 가장 이로운 것이 가장 옳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로움은 어떻게 따지는가. 공리주의를 처음 정립한 제레미 벤담은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가치를 하나의 지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예를 들어, 사랑·평화·기쁨·고통·불안·공포 등의 가치는 애초에 질적인 변수이기 때문에 서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단일한 기준이 필요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밥 먹은 후 포만감 30점, 영화를 본 후 감동은 50점, 친구에게 받은 상처는 -40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가치의 합을 계산하여 가장 큰 값이 나오는 선택이 가장 올바르다는 것이 공리주의다. 주목할 점은, 1800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 왜 벤담은 갑자기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을 끄집어낸 걸까, 하는 의문이다. 당시 유럽은 이미, 로크에서 시작해 루소를 거쳐 칸트에서 완성된 자유주의가 사상의 기본틀이 돼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이미 사적재산권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세계적으로 크게 판벌였던 시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벤담은 당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와 재산권 개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토대를 다시 구성하기 위해 공리주의를 고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로크의 생각을 살펴보자. 로크의 자유주의 이론은 소유권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 물건이 왜 당신 것이냐고. 답변은 간단하다. 당신이 상점에서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거듭 소급될 수 있다. 당신이 구입하기 전, 왜 그 물건은 상점 주인의 것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다 보면 그 물건을 구입하지 않은 최초의 사람에게 도달한다. 왜 그 물건은 제작자의 것인가. 이 지점에서 로크는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주인 없는 자연에 나의 소유인 나의 신체로 노동을 섞어, 그 자연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면, 그 결과물은 나의 것이 된다. 산속에서 자란 산삼은 주인이 없지만, 그것을 내가 발견하여 캐면 나의 것이 된다. 산에 갱도를 뚫고 암석을 캐내 녹여 금을 채취하면 그 금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주인 없는 땅에 울타리를 설치해 토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심거나 건물을 지으면 그 땅은 내 소유물이 된다. 당시 사람들은 로크에 동의했고, 유럽인들은 주인 없는 자연을 찾아 전 지구를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그보다 한 세기 뒤에 벤담은 로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동과 소유권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논리적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벤담은 생각했다. 나의 신체로 노동을 보탰다고 산속에 묻힌 금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으며, 주인 없는 땅에 내가 먼저 깃발을 꽂았다고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으며, 다만 소유권이 인정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리주의의 출발점이다. 내가 일했다고 나의 소유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지만, 그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벤담의 생각은 직관적으로도 쉽게 수긍된다. 세상만사 어떤 것도 원래 그런 건 없다. 천부인권이니 기본권이니 하는 것도, 자유나 평등 같은 가치도,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끼리 그것을 합의하는 편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더 증진한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결국 벤담의 의하면, 지금의 인간 사회를 떠받치는 근간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이로움이다. 현재 우리의 관습·전통·윤리·제도·법 등의 문화 일반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원리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을 가장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구성하여 합의했다는 뜻이다.


보통 공리주의의 약점을 소수에 대한 억압·무시 등을 드는데 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거나 피상적인 비판이다. 예를 들어 보자. 8000명이 관람 중인 경기장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용의자를 붙잡았다. 그런데 용의자는 폭탄 위치를 실토하지 않는다. 이때 공리주의자는 당연히 고문해서라도 폭탄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대개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문하지 않을 경우 8000명의 목숨이 확실히 날아가지만, 고문할 경우 1명의 신체만 고통 받는 대신 8000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리 계산에 의해 고문하는 선택이 더 옳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그렇게 수준 낮지 않다. 진정한 공리주의자는 저 상황에서 고문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단순히 그 상황의 공리만 계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테러범에 대한 고문이 허용된다면, 앞으로 유사한 상황에서 고문은 고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용의자에 대한 고문이 일반화된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의 잠정적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것은 더욱 큰 불행을 가져오기에 공리 계산에서 고문하는 판단은 결코 고문하지 않는 판단보다 이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공리주의는 완벽한 이론일까? 이제 공리주의의 진짜 문제점을 살펴보자.


흥미로운 건 벤담의 공리주의를, 벤담의 친구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이 격파했다는 점이다. 밀은 스승 벤담에게서 배운 공리주의의 약점을 치밀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첫째는,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각종 게임과 놀이문화를 즐길 때의 인지적 쾌감과 구석기 시대에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놀 때의 인지적 쾌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몸속에 솟구치는 엔돌핀 양과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혈관을 맴도는 엔돌핀의 양은 비슷할 것이다. 현대인의 생물학적 쾌감이 구석기시대인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두 사회 중 한 사회를 택해 살 수 있다면 현대 사회를 고를 것이다. 그편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400년 뒤 미래에서 어떤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 그들은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곳 사회는 문제가 많다고. 양극화·성차별·환경오염·착취·부정부패 등이 심해 불행한 사회라며 그들이 사는 시대에는 그 문제들이 싹 다 해결되었다고 같이 가서 살자고 하면 따라갈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그들이 진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익숙함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가장 편애하며 따라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각 시대가 가진 문화의 가치는 상대적이기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시대를 보편적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자연스럽게 보편주의로 흐른다. 자신이 사는 시대가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말이다.


둘째는 타인에게 간섭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이다. 여기 전체 인구가 10명인 사회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중 9명은 이성애자고 1명은 동성애자다. 그런데 그 9명은 동성애자를 죽도록 혐오한다. 그래서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가 되기를 강권한다. 동성애자는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 동성애자로 남고 싶지만 그러면 9명이 평생 고통 받고, 자신이 동성애자이길 억압하고 이성애자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면 본인은 고통스럽지만 9명은 편해진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지 명확히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그처럼 공리주의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의 행동과 생각에서 느끼는 행복과 고통마저도 계산에 넣는다. 그야말로 오지랖 넓은 철학이 되는 셈이다.


셋째는 진실과 거짓에 대해 규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희곡 <파수꾼>을 예로 들어보자. 마을 바깥은 늑대 떼들이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곳이라며 마을사람들은 높은 철책을 쳐놓고 마을 안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이장이 꾸민 거짓이다. 마을 밖엔 아무것도 없다. 마을 안과 다를 바 없다. 이장은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유대감을 위해 가상의 위험 요소를 상정하고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를 그것으로 돌린 것이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하게 오순도순 살 수 있게 됐지만.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이 이장에게 말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사실을 다 말할 거라고. 이장이 답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서 좋은 게 뭐냐고. 사람들은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며 제각각 마을을 떠날 것이고, 지금까지와 같은 화목한 공동체는 와해될 거라고 말이다. 소년은 어떤 결정을 내리면 좋을까.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마을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화목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되지만 지금까지의 평화는 산산조각난다. 공리주의자라면 여기서 선뜻 후자를 택하지 못한다. 진실이 오히려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밀은 스승 벤담의 이론이 불완전함을 간파했고 그래서 그것의 약점을 극복하고 보완할 새로운 이론을 제창한다. 우선 밀은 모든 가치가 통약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가령 놀이공원에서 자이로드롭을 타는 쾌감과 칸트를 읽는 충만감을 비교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더더욱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밀은 그러한 비교는 부당하다고 말한다. 양쪽 모두를 충분히 경험해본 사람만이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둘 다 제대로 해본 사람들이 더 많이 선택하는 쪽이 고급한 쾌락이라고 밀은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되물어선 안 된다. 거 봐라. 칸트를 읽는 게 고급한 취향이고 자이로드롭을 타는 게 상대적으로 저급한 취향이라면(거듭 말하지만 이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많이 택했냐가 구분 기준이다.), 칸트와 자이로드롭은 통약가능한 게 아니냐고. 칸트가 90점 자이로드롭이 30점인 셈인 거 아니냐고 말이다. 벤담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둘 중 무엇을 하는 게 더 좋은가 하면, 칸트를 읽는 게 더 좋다고 말이다.


하지만 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밀은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은 서로 대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벤담의 말이 맞다면, 사람들은 앞으로 자이로드롭과 칸트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늘 칸트를 택해야 한다. 데이트할 때도 연인과 칸트를 읽고, 엄마 아빠 효도 선물도 칸트책을 선물하고, 친구들과 여름 휴가도 북카페에서 칸트를 읽으며 더위를 이기는 게 최선이 될 테다. 하지만 그게 정말 최선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칸트책을 10권 읽는 것보다 칸트도 읽고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도 가고 여행도 가는 등 여러 활동을 하는 게 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고급 쾌락만 즐기는 것보다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골고루 즐기는 것이 더 이익을 높인다. 그렇다면 다양한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야말로 이익을 높이는 방안인 셈이다.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칸트를 읽는 게 더 이롭다며 강요하는 것은 강제이자 억압이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벤담의 공리주의는 꼰대스럽고 보수적이다. 밀이 새로 정립한 이 이론을 벤담과 구분하기 위해 질적 공리주의라 부르고, 벤담의 공리주의는 양적 공리주의라고 따로 명명하기도 한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벤담은 자유주의가 싫어서 자신만의 이론인 공리주의를 따로 만들었는데, 제자 밀이 그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극복하겠다며 새로운 이론을 만든 결과가, 다시 자유주의를 지향하게 된 점이다. 최대한 다양한 쾌락을 선택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개인은 타인의 강제없이 자신이 원하는 쾌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니, 실상 자유주의가 된 셈이다.


그런 이유로 벤담과 밀은 사이가 나빠지는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는 사이가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지기 마련인 듯하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후설과 하이데거, 하이데거와 아렌트,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둘은 사제관계는 아니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를 흠모하며 따르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 프로이트와 아들러 등이 스승과 제자가 척진 후 서로 독립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한 사례다. 오히려 스승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각 제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이가 좋았다면 제자는 스승의 2인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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