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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06. 2019

04. 서양 철학 1

인식론

“내가 보는 이 세계가 정말 실제 세계와 일치할까?”


이 질문은 2000년이 넘게 유럽의 지성을 골치 아프게 했다. 언뜻 근본적인 질문처럼 들리지만, 막상 저런 식으로 질문한 사람들은 유럽인을 제외하면 없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도 저런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나도 저 질문 자체의 해답보다는, 왜 서구인들은 저 질문에 저토록 매달렸을까, 하는 부분이 더 궁금하지만. 인식론은 서양근대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이므로, 그 의문은 다른 지면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저 질문 자체에 빠져보도록 하자.


보통 사람들에게 “눈앞에 있는 컵이 실존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기타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작은 이는 기원전 4세기쯤 활동한 피론이다. 피론과 그의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감각을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대상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거나 들리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이거나 들린다. 둘째, 감각기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꿀은 혀에는 달지만, 눈에 넣으면 괴롭다. 이때 우리는 혀를 믿어야 할까 눈을 믿어야 할까.


셋째, 느끼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과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이 다르고, 똑같은 대상이어도 기분 좋을 때와 기분 나쁠 때 다르게 지각된다. 넷째, 같은 대상이어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어떤 이에게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차갑게 느껴진다. 같은 위치, 같은 감각기관, 같은 마음 상태, 같은 사람이어도, 외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밝은 곳에서와 어두운 곳에서 대상의 빛깔이 달라지고, 탁 트인 곳과 밀실에서의 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피론과 제자들은 눈앞에 있는 대상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감각기관을 믿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증명할 근거는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그들은 답을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오랫동안 학자들은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특히 중세 1000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신의 주관 하에 그러한 질문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 세계의 존재 근거는 신이었고, 신이 존재하는 한 이 세계는 굳건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중세인의 머릿속에서는 그랬다.


이 질문을 다시 진지하게 물은 사람은 데카르트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피론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오감은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느끼는 감각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이 악마의 속임수라 생각했다. 사악한 악마가 부리는 지독한 술수라고 말이다. 따라서 이 우주 자체가 허상이라고 데카르트는 가정했다. 심지어 자신도 가짜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진짜는 무엇인가? 진짜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동안 데카르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악마가 술수를 부린다면, 그 술수에 속고 있는 나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게 가짜라고 생각하는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조심스럽게 첫 번째 결론에 도달했다. 속고 있는 동안은, 의심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걸로 나의 존재는 증명되었지만, 여전히 나를 제외한 모든 우주는 거짓이다. 온 세계는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만든 허상이 되고 만다. 이제 이 우주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완전한 개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완전한 원, 완전한 책상, 완전한 사람, 완전한 사랑 등등. 그런데 현실에는 아무것도 완전한 것이 없다. 세상의 모든 원은, 책상은, 사람은, 사랑은, 모두 불완전하다.


세상엔 온통 불완전한 것들뿐인데, 왜 내 머릿속에는 완전한 것들이 가득할까. 적어도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완전한 개념을 창출할 수 없다. 감각기관을 믿을 수 없고, 여전히 외부 세계는 악마가 만든 허상이며, 무엇보다 불완전한 것의 합이 완전한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 머릿속에 완전한 것들이 존재하는가?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 든 완전한 개념들에 대한 원인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완전한 개념들에 대한 원인 또한 완전해야 한다. 어떠한 완전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내 머릿속에 완전한 개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완전한 원인을 신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완전한 개념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면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완전한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논증을 히에로니무스에게서 배웠다.) 더불어, 완전한 원인(=신)이 내 머릿속에만 완전한 개념을 만들고, 악마가 거짓 우주를 만든 후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악마의 술수를 내팽개쳤다면 그것은 완전한 원인일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개념은 외부 세계에도 존재해야 하며, 그 외부에 존재하는 완전한 개념은 완전한 원인(=신)이 만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를 제외한 모든 우주는 실존한다. 그것이 데카르트가 완성한 논증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황당할 것이다. 기껏 신을 내쫓은 줄 알았더니, 기-승-전-‘신’이라니!? 당시 학자들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가상디 같은 경우는 피론주의 편에 서서 직관에 의해 깨달은 것(=진리)과 직관에 의해 깨달은 것처럼 착각한 것(=사이비 진리)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고 데카르트를 타박했다.


그 후 수많은 학자들이 데카르트를 반박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니체는 언어적 습관을 탓했다. 인간 언어의 문장은 반드시 주어와 서술어가 들어간다. 그 때문에 행동이 있으면 그 행동을 행하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행동만 있고 주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It snows'라든가 'It's raining' 같은 경우, It은 실존하는가? ‘번개가 친다’에서 번개는 주어인가 동작인가? 우리는 번개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 또한 실체가 아니라 일시적 현상이라면?


이 생각을 확실히 밀고 나간 이가 20세기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이다. 그는 우리가 용액 속에 담긴 뇌일지도 모른다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뇌에는 온갖 전선이 꽂혀 있고 전선의 반대편에는 수퍼컴퓨터가 연결돼 있다. 그 컴퓨터가 전선을 통해 뇌에 모든 감각과 생각을 전송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사고는 사실 컴퓨터가 주입한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때 나라는 존재는 무기력한 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의 실체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한때 형제였던 워쇼스키 자매는 이 아이디어를 모티브로 영화 <매트릭스>를 만들었다.)


유사한 생각의 또 다른 흥미로운 버전이 닉 보스트롬의 ‘시뮬레이션 이론’이다. 쉽게 말해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를 떠올리면 된다. 이 세계는 어떤 뛰어난 존재가 만든 컴퓨터 게임 속이며, 우리 인간은 게임 속 캐릭터라는 말이다.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뿐임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자아니 자유의지니 그런 망상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문제는 닉 보스트롬이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증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퍼트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둘의 사고실험은 결국 데카르트의 증명이 실은 ‘망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심각한 예시다. 뇌과학과 신경학이 발달한 요즘, 다수의 과학자들은 이성적 사고라는 것도 결국은 뇌와 신경의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의 작용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성을 감각과 전혀 다른 차원이라거나 더욱 우월하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데카르트 이야기는 이쯤 하고. 데카르트를 극복하고자 한 다음 학자는 존 로크다. 로크는 피론과 데카르트가 감각을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감각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피론도 데카르트도 모든 감각을 구분하지 않고 한 종류로 이해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누군가는 지금 춥다고 몸을 움츠리고, 누군가는 덥다며 부채질을 한다면, 그럼에도 우리는 두 사람의 말을 다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감각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늘을 보더니 태양이 2개라고 소리 지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환각을 보거나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주관적일 수 없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로크는 위와 같이 감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누가 봐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성질은 제1감각,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감각은 제2감각이라고 구분했다. 그리고 피론과 데카르트가 우려한 감각의 상대성은 제2감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제1감각과는 무관하다고 봤다. 그럼에도 피론과 데카르트는 제2감각의 불완전성을 감각 일반의 특징이라고 확대해석했기 때문에 회의론에 빠진 것이라며 비판했다. 제1감각은 누가 봐도 자명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제1감각을 근거로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로크의 결론이다.


그걸로 로크의 논의는 충분할까? 가령 이건 어떨까? 지금 내 눈앞에는 모니터가 1개 있다. 아마 다른 사람 눈에도 모니터가 1개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옆에 모니터가 1개 더 있는데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거라면? 미친 생각이지만, 적어도 합리적으로 틀렸다고 논증할 방법은 없다.


세상에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가시광선을 제외한 나머지 전자기파는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공기 중에는 산소도 질소도 존재하지만 보이진 않는다. 뉴트리노나 암흑물질도 마찬가지다. 존재하지만 오감으로 감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떤가? 감각되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가?


그러한 로크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었던 버클리는 아예 논의를 반대 방향으로 틀어 버렸다. 감각하는 것만 존재한다고 말이다. 지금 당신 머리 뒤에 해가 있다. 그런데 당신이 보고 있지 않으면 해는 없는 것이고 당신이 해를 보면 다시 해는 존재하게 된다. 최소한 감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방금 당신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대고 5층으로 올라왔다. 지금은 차를 감각하지 못하므로 차가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면 차를 볼 수 있으므로 그 순간에 다시 차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 현실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쨌거나 그 대상을 누군가 한 명이라도 감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버클리의 말을 들은 당시 사람들은 황당했다. 그래서 누군가 버클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버클리 씨는 오늘 아침에 댁에서 부인을 보고 집을 나왔을 것이다. 아침에는 부인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세상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부인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버클리 씨의 부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냐고. 당황한 버클리는 고민 끝에 자신의 논의를 보완했다. 걱정할 것 없다고. 이 우주 만물을 항상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항상 존재하는 거라고 말이다. 버클리의 직업이 주교였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자연스런 귀결인지 모른다.


데이비드 흄은 버클리의 어이없는 논의에 귀 기울일 의지가 없었다. 그는 차라리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인간은 이 우주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고 끝내 논증할 수 없으며, 그걸 알 수 없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우주의 존재유무에 관심 없으며,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잘 살아낸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또한 알지도 못할 우주의 존재 증명에 더 이상 에너지를 쏟지 말고 현실의 문제들에 더 관심 가지며 사는 게 생산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우주도 마찬가지고 신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부터 인간이 나아갈 길은 신의 존재를 믿고 사는 길이라고, 파스칼은 생각했다. 그는 믿음의 정당성을 ‘도박사 논증’으로 증명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신이 있다고 믿을지 없다고 믿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신이 있다고 믿으면 천국에 가거나(신이 실존하는 경우) 허무하지만(신이 부재하는 경우), 신이 없다고 믿으면 지옥에 가거나(신이 실존하는 경우) 허무하다(신이 부재하는 경우). 따라서 신이 있다고 믿는 게 합리적(?) 선택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파스칼의 가르침대로 신을 믿으며 신앙에 따른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괜찮은 걸까? 적어도 이마누엘 칸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시대까지 대립되던 논의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았다. 그 중 하나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인식론의 논쟁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칸트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 우리가 감지하는 이미지와 실제 외부 세계의 모습이 일치하는지 알려면, 우리가 감각하는 이미지와 실제 외부 세계를 둘 다 알아야 하는데, 그 누구도 외부 세계 자체를 감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울 속 내 얼굴이 실제 내 얼굴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려면, 내가 직접 거울 이미지뿐 아니라 내 얼굴도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으며, 다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실제 내 얼굴과 일치하겠거니 믿고 살아갈 뿐이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왜 저 컵이 나에게는 이러한 이미지로 감각되는 걸까,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감각될까, 하는 점이다. 관건은 대상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서 때에 따라 랜덤으로 감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저 컵은 (내가 술에 취하거나 꿈을 꾸거나 정신병에 걸리지 않은 이상) 항상 같은 이미지로 감각되며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의 진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그 외부 세계가 왜 나에게 이러한 이미지로 감각되는 것일까에 대한 답변을 칸트는 찾아야 했다. 거기에는 어떠한 메커니즘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감각하는 이미지와 다른 사람들이 감각하는 이미지가 심지어 거의 흡사하다면, 거기에는 공통된 어떤 경위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칸트는 세상을 특정 이미지로 감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감각기관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적외선 카메라로 세상을 촬영하는 것과 엑스레이로 촬영하는 것과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다르다. 각각의 카메라로 촬영한 세상의 이미지에는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특성은 세계의 실제 모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특징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보자. 똑같은 세계일지라도 뱀이 보는 세계와 금붕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가 보는 세계와 인간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 그 이유는 세계에 있지 않고 각 감각 주체에 있다. 정확히는 감각 주체가 지닌 감각 기관의 특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의 특징을 분석하면 우리가 감각하는 이미지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그 작업에 착수했고 인간 감각의 특성을 12가지로 분류했다. 여기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더 알고 싶은 분은 다른 서적을 참고하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바란다. 다만 칸트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지면의 목적이다.


칸트는, 인간에게는 공통된 감각 기관이 주어졌으며 그 특징 또한 동일하기 때문에 전 인류가 감각하는 세계의 이미지는 보편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구성하는 실체의 이미지를 공유할 수는 있다. 혹시 내가 보는 세계와 친구가 보는 세계가 다를까봐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자신이 느낀 세상에 대해 오류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인식론에 관심 없다. 어차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왜 이 사소한 질문이 위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2000년 넘게 붙잡아 두었는지 궁금해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러한 질문 방식이 서구 세계를 일정한 방향을 이끌어온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러한 주제에 관해서는 추후 다른 지면을 약속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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