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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31. 2022

무기력에 노련한 사람 있나요?

무기력은 초연함이 될 수 있을까

1.

2주 전쯤인가 <라디오스타> 옛날 방송분을 보다가 천하의 유세윤이 울컥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유세윤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면서 해당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며 급발진하더라. “‘나는 무엇이 될까?’ 꿈꾸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인 것 같은데 이제 무엇이 돼버린 거 같은 거에요. 가장 행복했던 때를 이미 지나버렸구나 하는. 앞으로 뭐가 될까가 궁금하지 않은 거에요. 앞으로의 내 미래가 궁금하지 않아서...”


이 얘기를 듣자마자 완전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요즘 무기력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물론 맥락은 전혀 다르다. 나는 유세윤처럼 성공하지 못했고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경우는 이런 거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 과정이 머릿속에서 자동플레이 돼버리고, 내 기분은 시작부터 이미 끝을 본 상태가 된다.


맛있는 걸 먹어도, 대부분의 음식은 이미 다 아는 맛이기에, 익숙한 그 맛을 한 30분 즐기다가 배부르고 끝나겠지. 친구를 만나도, 밥 먹고 하릴없는 얘기 주고받다가 술 마시고 헤어지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또 쓸쓸해 하겠지. 여행 가면, 예쁜 데 가서 감탄하고 사진 박고 맛집 가서 먹고 밤에는 술 마시다 새벽에 잠들고 다음 날 숙취에 일어났다가 또 돌아다니다를 반복한 후 집으로 돌아오겠지. 한 번 봐서 결말과 반전을 다 아는 영화를 또 보는 기분이 요즘 내가 사는 기분이다. 나 다 해봤어. 그 기분 다 알아 이제. 이런 마음.


책을 읽어도 내용이 뻔하고 예측이 되면 읽기 싫어진다. 그러면 그 책은 던져버린다. 아주 가끔 전혀 새로운 내용의 책을 읽으면 그땐 정말 기쁘다. 그런 점에서 요즘 삶에서 그나마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는 건 독서다. 비슷하게는 영화나 드라마 감상도 꼽을 수 있다. 뭐가 됐든 전혀 예측되지 않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느낀다.



2.

마침 오늘 본 애니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나오더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었다. 연예인 유세윤의 우울증에 이어 이번엔 애니 주인공의 우울증이라니. 참 이런 우연이 싶었다. 스즈미야의 고민도 비슷했다. 세상이 다 시시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걸지 않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어차피 다 시시한 인간들뿐이니 말이다. 그는 외계인 미래인 초능력자를 만나길 꿈꾸고, 우연히 살인사건 같은 사건과 조우하길 기대한다.


잠깐 세계관을 스포하자면, 애니 속 세상은 여주가 만든 홀로그램 우주 같은 건데, 참을 수 없이 따분해지면 그는 세상을 부수고 다시 새로 만든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인들이 그가 세상을 부수지 않도록 조금씩 그의 기대를 충족해주는 그런 내용이다. 하지만 잔챙이들로 세상을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말에서 그는 사랑에 빠지고 세상에 애정을 가지는 걸로 끝난다. 정답은 역시 사랑이다.


클리셰 같은 결말이지만 역시 수긍은 된다. 사랑이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서서히 알아가며 내가 그의 세계를 조금씩 공유해가는 과정이잖은가. 반대로 말하면 미지와의 조우는 모두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역시 처음에 대한 설렘은 우울증에 치명적인가 보다.



3.

다시 내 상황으로 돌아와서. 모든 게 다 시시하고 빤해서 무기력하지만, 그럼에도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나는 지금도 내가 아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길 소망한다. 이게 참 아이러니다. 아니 앞으로의 삶이 이미 다 살아본 듯 빤하게 여겨지면서도, 대체 왜 그 빤한 시간이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걸까. 오늘 죽어도 무방한 마음상태인데도 그렇지 않다는 거다.


많은 현명한 선인들은 죽음에 초연했다. 소동파나 장자가 그랬고. 고대 그리스의 아킬레우스나 디오게네스도 그랬고, 좀 더 가까이는 키케로나 미시마 유키오도 그랬다. 근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그랬던 그들이 정작 자신의 삶은 무척 충실하고 낭만적으로 살아냈다는 거다. 그들은 하루 한시를 허투루 살지 않았다. 내일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다는 마음이었으면서도 그들 모두는 주어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겼다.


나는 이 대목에서 손쉬운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다. 좀 더 고민해보고 싶다. 죽음에 초연한 태도, 삶이 허무함을 이미 알아버린 마음, 그럼에도 삶을 충실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풀어내면 내 무기력도 끝날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있다. 숙제가 생기니 조금은 기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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