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수를 하면 내 얼굴은 깨끗해지지만 그만큼 물은 더러워진다 세상은 이토록 대칭적인 것 - 나의 고교 졸업 문집에서 동기가 쓴 글
2. 디즈니랜드 효과. 미국에 디즈니랜드가 있음으로써 실은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은폐된다는 개념. 꼭 디즈니랜드가 아니어도 얼추 의미는 통한다. 가령, 백화점 공동묘지 정신병원 교도소 등.
3. 청소와 쓰레기통에 대해 생각한다. 초등 6학년 교실 청소할 때 일이다. 뭐든지 열성적이던 친구 A가 교탁‧책장‧사물함 밑까지 빗자루를 쑤시며 먼지뭉치들을 긁어냈다. 옆에서 설렁설렁 하던 친구 B가 역정을 냈다. “왜 쓰레기를 자꾸 만드는 거야?” 듣다 못한 담임쌤이 되받아치셨다. “청소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이 녀석아!”
지금 생각하면 친구 B는 청소의 본질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꿰뚫고 있었던 셈이다. 왜 청소하는가? 깨끗해지고 싶어서? 그건 현상적 차원의 답이다. 찌꺼기를 쓰레기통에 담는 일. 그건 훨씬 심층적인 문제에 가닿는다. 우리는 더러움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옮긴 후, 쓰레기통만 더럽다고 여긴다. 그 생각은 자동반사되어 쓰레기통 이외의 곳은 깨끗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착각이다. 청소해도 교실바닥은 더럽다. 다만 쓰레기통이 악역을 맡았다. 세상 모든 더러움을 떠안은 욕받이.
영화 제목이 ‘차이나타운’인 건 그래서다. 사람들은 마치 차이나타운만 무법천지인 양 떠들어대지만, 사실 모든 일상이 차이나타운이다. 그렇지 않은 척할 뿐. 영화 마지막 씬에서 등장인물들은 차이나타운으로 가 탈출을 시도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곳에서는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은 차이나타운에 있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주술 혹은 기만.
4. 어릴 때 나는 내가 ‘네오’라 믿었던 적이 있다. 세상을 바꿀 거야, 다짐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오라클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네오가 아닌가 보다 깨달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만났어야 할 대상은 오라클이 아니라 이 문장이다. “너 자신을 알라.”
기티스(잭 니콜슨)도 아직 저 문장을 만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파헤칠 수 있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래서 약하고 선한 자들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인이다.
그는 한때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가 경찰을 관둔 이유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소중한 이를 지키고 싶어한다. 그가 사립탐정이 된 이유다. 그의 실패의 이유는 그가 몸담았던 공직(경찰) 탓이었을까. 나는 이미 위에서 인간 악의 이유가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소속의 탓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문제라 밝혔다(그것이 인간 본성인지 여부는 논외!). 기티스가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 이유도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문제에 기인한다. 그는 사립탐정으로서도 끝내 에블린을 지키지 못했다.
5. 그러므로 어쩌면 인간이 될 수 있는 최상급은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영웅’이 아니라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상태’가 아닐까. 선과 악, 강자와 약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깨끗함과 더러움, 가해자와 피해자, LA와 차이나타운. 이런 이분법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깨달음을 무한히 지연시키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살아봐야 내가 네오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듯. 영화가 끝나봐야 범인의 승리를 알 수 있듯.
문제의 근원은 저 이분법 너머에 있다. 도식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선과 악을 구분한 후 악을 배제하고 처벌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건 착각이다. 그러므로 노아 크라운을 악으로 몰아세우는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다. 그 실패의 결과를 기티스가 몸소 보여준다. 영화의 사건‧사고들은 정말 노아 크라운이 원인인가.
영화의 서스펜스적 연출은, 무한한 희망고문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과 닮았다. 순진한 관객은 영화의 끝에 진실과 정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 모두는 한때 네오-꿈나무였다. 살면서 포기하거나 잊어버리지만. 그럼에도 소수의 누군가는 (기티스처럼) 여전히 네오를 꿈꾸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조차 “너 자신을 알라”고 철퇴를 내리는 영화 <차이나타운>. 영화의 엔딩은 처연하지만 묘하게 매혹적이다. 거기에는, 예정된 실패를 마주한 절망과, 진실을 깨친 승화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