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공포분자>의 난해함에 대해
자살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진짜 속마음. “나 죽어버릴 거야!”라고 외치면서도. 빨리 뛰어내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은 죽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나 너무 힘드니 좀 도와달라는 우회적인 표현임을. ‘나는 살고 싶다’의 반어법임을 안다.
이런 사례는 어떤가. 어떤 사람이 “나는 맹세코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서, 간헐적으로 다리를 떨거나 코를 긁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 말을 믿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분명 그의 말과 행동은 괴리되는데. 그 둘의 의미가 충돌하는데. 어떻게 우리는 그 괴리와 충돌을 넘어 진실을 향해 갈 수 있을까.
몽타주. 개별적인 숏들이 편집으로 이어져 정합적인 의미를 형성하는 영화의 기법을 말한다. 가령, 한 남자가 칼을 든다.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남자가 피 묻은 칼을 닦으며 뒤돌아간다. 이 숏들의 연결만으로 관객은 남자가 여자를 찔렀음을 파악한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찌르는 숏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찔렀다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정말 남자는 여자를 찔렀을까.
영화 <공포분자>의 연출은 끊임없이 개별적인 요소들을 충돌시킨다. 화면 속 인물들의 위치가 어긋나고. 카메라의 시점과 인물의 시선이 빗나가고. 숏과 숏이 어긋나고. 영상과 대사가 따로논다. 그럴 때마다 관객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화면의 중앙에 초점 맞출 것인가 멀찍이 비껴 선 인물을 볼 것인가. 카메라의 시점을 따라갈 것인가 인물의 시선을 따를 것인가. 개별적인 숏들의 연결을 하나의 씬으로 간주할 것인가 두 씬의 교차로 해석할 것인가. 영상에 나오는 인물을 믿을 것인가, 말하는 인물을 따를 것인가. 영화는 그간 쉽고 친절한 편집과 연출에 길들여진 관객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빠뜨린다. 그래서 당신이 도달한 진실은 무엇이냐고.
소설은 내일 또 쓰면 된다고 위로하는 남편의 말과, 자신의 소설을 무시하며 읽어보지도 않는 남편의 행동 사이에서, 주울분이 도달한 진실은 무엇인가. 왕안(장난전화녀)에게 군대 다녀올 동안 기다려달라는 소강(사진남)의 속삭임과, 며칠 후 곧바로 전 여친에게 돌아가는 소강의 행동 사이에서, 소강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인가. 이립중이 직장동료와 아내의 내연남을 살해하는 첫 번째 엔딩과, 자살하는 두 번째 엔딩 사이에서 관객이 도달한 진실은 무엇인가.
소강과 왕안은 서로에게 묻는다. 왜 그런 장난전화를 하냐고. 왜 너는 그런 사진을 찍냐고. 소강은 답한다. 장난전화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자신의 사진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 말은 자신의 사진촬영이 무의미함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득이 되거나 실이 된다는 건 무언가 의미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아무런 득실이 없다는 건 의미조차 없다는 말이다. 왕안의 장난전화로부터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다면, 그는 왕안의 장난전화로부터 모종의 의미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울분이다.
주울분이 남편과의 이별을 결심하는 계기는 왕안의 장난전화다. 우리는 왕안의 장난전화가 완전히 거짓임을 안다. 그리고 주울분도 남편이 바람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불러준 주소로 찾아가 엉뚱한 남자(소강)를 만난 주울분은 그것이 시덥잖은 거짓임을 깨달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주울분은 남편과의 이별이라는 진실에 도달한다. 왕안의 장난전화는 실제로도 거짓이며, 주울분 또한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왕안의 장난전화와 주울분의 이별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비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 비약을 연결시키는 걸까. (여기서 나는 소강의 사진을 상상계에, 왕안의 장난전화를 상징계에 비유하여 라캉적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도식적인 분석이 오히려 이 영화를 단순화시킬 것 같아 참겠다)
왕안이 엄마 몰래 가출하여 도박장으로 숨어들어가 불을 켜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기절한다. 그런데 그 거대한 사진은 한 장이 아니다. 작은 시트들을 이어붙여 놓았다. 그 사진을 적당히 멀찌감치서 보면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지만, 창문을 열어 바람이 불면 시트들은 제각기 펄럭이며 매우 기이한 인상을 띤다. 그것이 영화가 구성되는 방식이라고, 나아가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에드워드 양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말년에 에드워드 양이 <하나 그리고 둘>에서, 사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진실의 나머지 절반을 보여줄 수도 있다며 낙관하는 동시에, 모든 게 불확실한데 왜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냐며 비관하는 모순이, 필연적 수순으로 읽힌다.
나는 여기서 손쉽게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이 무어라 결론 내리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럴 능력이 없다. 다만 가끔 <공포분자>를 떠올릴 것이다. 개별적이고 심지어 충돌하는 요소들이 어떻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