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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22. 2017

그리 쉽게 용서를 말하지 말아요

영화 [하루]의 결정론적 세계관



준영(의사) 민철(구조대원)은 각자의 이유로 강식(택시기사)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래서 강식이 준영과 민철에게 복수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강식은 준영의 딸과 민철의 부인을 살해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복수가 이루어지는 하루가 세 사람에게만 무한 반복되고, 반복의 마무리 시점은 강식의 죽음이다. 강식이 죽으면 다시 시간은 그날 오전으로 되돌아간다.    


준영과 민철은 자신의 딸과 아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어떤 갖은 노력을 해도 끝내 두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 알게 된 강식의 존재와 더불어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떠올린다. 그때 준영과 민철의 선택은 정반대다. 준영은 강식에게 용서를 빌겠다 하고, 민철은 강식을 죽이겠다 한다. 하지만 강식이 죽으면 시간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민철의 선택을 필연적으로 오답이다. 복수에 대해 또 복수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이 게임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고, 그 답을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방식이다. 그 답은 준영의 선택대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준영의 딸과 민철의 아내뿐 아니라 강식까지 세 사람 모두를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지나치게 구태의연하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는 너무 빤하며, 그래서 그들이 나뿐인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게임 시나리오를 보는 것마냥 단선적이다. 영화 속 세 사람의 눈에는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스스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을 하는 소픔처럼 보였을 텐데, 관객의 시야에는 그 세 사람 또한 주어진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게임 캐릭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물의 입체성과 고유성은 사라지고 단지 미션을 수행하는 몰개성의 유닛 셋만 보인다.    


그래서 준영이 강식의 생명을 조금씩 연장시키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보기 불편할 정도로 작위적이다. 대체 누구를 향한 사죄이며,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한 이기적인 사죄인가. 차라리 그랬다면 오히려 준영의 얼굴이 더 인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딸을 구하는 것도 게임 속 시나리오이며, 따라서 사죄하는 것도 시나리오대로다.    


준영 민철 강식 세 사람반복되는 하루 속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도 전체 이야기 속 꼭두각시일 뿐이다. 반복되는 하루라는 시간이 그들에 의해 전혀 다른 가능성과 결과를 가져다줄 것 같지만, 반복되는 시간 자체와 그 시간 속 캐릭터들의 선택 또한 이미 결정된 전체 시스템 속의 한 구성물들일 뿐이다. 그들은 아무리 발악해도, 몇천 몇만 번의 하루를 반복해도, 정해진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그 모든 반복이 이미 짜인 놀이판이다.    


당연한 결말의 수순대로, 강식은 준영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그를 용서하고 그의 딸을 껴안는다. 마지막에 강식이 준영의 딸 은정을 만나는 장면은 그래서 더 가슴 아리다. 러닝타임 내내 내가 단 한 번 본 인간의 얼굴은, 그때 강식의 모습을 통해서였다. 자신도 초컬릿을 좋아한다며 해맑게 웃는 은정의 표정 옆에 대비되는 무감각하고 무신경한 그 얼굴. 용서를 받아들였지만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용서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용서를 떠안게 된 듯한 바로 그 표정 말이다.    


사실 모든 영화가 그렇다.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정해져 있고, 등장인물의 행동과 선택 또한 그러하다. 다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들을 처음 접하는 것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처음부터 봐도, 달라지는 것 하나 없는 똑같은 장면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만약 우리 삶 또한 영화처럼 다 결정된 것이라면. 이미 우리 우주가 결정되어 있고,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정된 세계가 현실로 펼쳐지는 것뿐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우주를 아무리 반복해도 동일한 과정과 결과만 도출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삶을 사는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도 시스템의 일부라면 질문을 고쳐야겠다. 이렇게 묻자. 이미 다 정해진 삶에 어떻게 의미부여할 수 있냐고.


내게 강식의 마지막 표정은, 그 질문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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