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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Sep 14. 2016

비밀이 모여 삶이 된다

[청춘시대]가 건네는 말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뿐이야."


윤진명의 독백은 드라마 [청춘시대]를 보는 내내 지침이 되었다. 첫화에서 유은재의 태도에 답답증을 안 느낀 시청자가 있을까. 강이나의 천박함에 고개를 젓고, 윤진명의 강박이 미련하게 보이는 건 당연. 나중엔 정예은의 일편단심에 한심함을 느끼는 것이 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기본적으로 안고 가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하나씩 공감과 이해로 변한다. 물론 등장인물의 독특한 성격을 규정짓는 과거사 한 둘쯤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풀어가는 것은 서사의 기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 드라마 영화는 그것을 등장인물을 납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주변화하지만, 청춘시대는 그것 자체가 내러티브를 이루는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성격과 품성은 그 사람의 기질(=생물학적 요인)과 그의 자유의지의 산물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내가 착한 건 나의 기질과 노력에 따른 것이고, 니가 못된 건 너의 기질과 선택에 의한 결과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라고 청춘시대는 묻는다. 강이나가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탓인가. 윤진명이 그토록 절제심이 강하고 성실한 것은 오직 그녀의 몫인가. 만약 그 둘의 상황이 서로 바뀐다면 어떨까. 그때도 강이나는 막(?) 살고, 윤진명은 근면성실할까.


마지막에 윤진명은 결국 남동생을 안락사시키기 위해 발길을 나선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가 눈치채고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아들을 안락사시킨다. 만약 윤진명에게 그런 어머니가 없었다면, 그녀는 운명적으로 남동생을 죽인 살인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강이나에게는 그런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렇게 살아라"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내가 느끼는 부당함과 억울함이 나의 탓은 아닌가.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나를 덮친 사건들이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든 걸까.


1980-1990년대 미국에서는 최면술과 심리치료가 대유행이었다. 범죄와 일탈이 만연하던 시기였다. 최면으로 유년의 트라우마를 찾고, 너의 삶이 지금처럼 망가진 건 니 탓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때문이라고 위로하는 것이 정신과의사들의 역할이 되었다.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만난 탓이라고. 하지만 그 아버지가 엉망이 되어 자식을 망친 건 누구 탓인가. 그런 식으로 원인과 책임이 무한소급되면 결국 누구의 탓도 아니게 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덕분에 미국 사회는 더욱 방종해졌다. 나의 범죄가 내 잘못이 아니라 내 아버지 내 가족의 탓이라고 말해주는 정신의학계 탓이다. 개인의 행동을 오로지 사회적인 요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타당한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믿는다면 위와 같은 판단은 부당하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우리에게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그걸 택한 건 자신이다. 물론 나에게 고작 그 정도 선택지 밖에 주지 않은 건 환경의 탓이지만 말이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 청춘시대는 인물들의 선택을 무한정 용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힘들어 하고 아파한다.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 탓을 하고 또 누군가는 끝없이 견뎌낸다. 다른 누군가는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고 성찰한다.


다시 한번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 개인에게 제한된 선택지를 주는 것은 환경이다. 거기에 개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인간은 그냥 그 상황에 내던져진 것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건 여전히 개인이다. 물론 보통은 이기적이고 쉬운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 선택들이 모여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마주하는 건 그 결과물이다. 쟨 참 못됐어. 쉽게 상대를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과거를 안다면. 우리 또한 그런 선택지를 받았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 몇 개는 있다. 내게 주어진 비참한 상황. 내가 선택한 부끄러운 행동. 하지만 그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 모두가 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의 삶도 당당할 수 있다고. 벨에포크 주인 할머니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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