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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l 07. 2017

우리는 ‘옥자’를 구할 수 있을까

영화 [옥자]의 낙관론과 비관론



[옥자]를 처음 관람했을 때 실망스러웠다. 두 번째 봤을 때 엔딩씬에서 약간 눈물이 났고 전체적으로 해석이 쉽지 않아 혼란스러웠지만, 실망스러움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전작인 [설국열차]와 주제적으로는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이지만, 전체적인 내러티브나 카메라 워크, 편집과 미장센 등은 훨씬 단조롭다. 무엇보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전부와 비교하면, 해석의 여지가 지나치게 왜소하다 못해 이미 답정너인 정도다.
    
[옥자]를 얘기할 때 생태·환경·자연·다국적기업·GMO·자본주의·신자유주의 등의 소재는 빠질 수 없다. 이 단어들을 말하지 않고 다른 방식의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옥자]는 이미 하나의 정해진 주제 내에서 감상할 수밖에 없는 폐쇄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비평이 아니라, 작품을 최대한 온전하고 선량하게 해석하는 것이기에, 여기서도 [옥자]가 전하려는 세계관을 세심하게 건져올리기로 한다.
    
영화가, 미자=ALF=선/미란도=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읽히진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게 아니었을 거라는 믿음이 있고, 무엇보다 미자의 생각과 ALF의 행실, 미란도 측의 언행 등을 통해서도 선과 악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미자는 옥자를 제외한 다른 거대 돼지들에게 별다른 동정심이나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자의 관심과 목표는 옥자 구출이다. 그녀에게 다른 돼지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고, 미란도가 어떤 회사인지도 상관없다. 그렇기에 미란도의 도축장에서 다른 돼지들이 무수히 잘려 나가는 장면에서도 미자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ALF는 자신들의 작전을 위해 미자와 옥자를 속이고 희생시킨다.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위험한 공리주의자들이며, 전통보다 자신들의 업적을 더 중시한다. 이쯤 되면 생명 자체가 우선인지 자신들의 선행이 우선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강에서 나올 때 휴대폰을 물에 다 적시고, 미란도의 만행은 세상에 알렸으나 끝내 사설보안업체에 붙잡히고 옥자를 구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서툴고 어설프기까지 하다. ALF 또한 어떤 면에서는 무지하거나 무능력하고, 자기중심적이거나 편향적인 가치관을 지녔다는 점에서 온전한 정의로 볼 수 없다.
    
조니 윌콕스 박사의 이중적인 모습도 마찬가지다. 방송에서 동물에 환장한 듯한 기행과 경영진 회의에서 자존심 내세우다 쳐박히는 꼴, 실험실에서 소주 나발을 불며 광기를 표하는 행동을 보면, 악인이라기보다 그 또한 철저하게 기업에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안타까운 인물로 여겨진다. 루시 미란도가 소비자들이 하도 GMO에 거부 반응을 보여 어쩔 수 없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는 말에서, 낸시 미란도가 자신들은 합법적이고 떳떳하게 사업하는 것이고 늘 공정성과 균형을 유지한다는 듯한 태도에서도 그들이 악의 축이라고 단정짓기엔 미심쩍다.
    
그럼에도 명확하게 이원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첫 씬에서 옥자의 발바닥에 박힌 밤송이를 빼내는 장면과, 미자와 옥자가 ALF로부터 쫓기다 다이소 가게에 곤두박질 치는 장면이다. 전자에서는 밤송이를 빼도 옥자가 피를 흘리기는커녕 아주 신이 나서 감나무를 들이받는다. 후자에서 플라스틱 조각은 옥자의 몸에 박혀 피를 흘리게 한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한데, 우선 자연은 생명체를 해치지 않지만, 인위적인 것은 생명체를 해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주의 질서가 성립하지 않는 곳, 즉 미자의 집과 산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지만, 자본주의적 세계에서는 서로를 해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위와 같이 읽을 수 있는 또다른 단서가, 옥자가 똥을 싸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옥자는 두 번 똥을 싸는데, 첫 번째가 첫 시퀀스인 산에서 미자랑 놀다가 연못에 싸는 장면이고, 두 번째가 ALF 트럭에 타고 미란도 측을 따돌리기 위해 박문도에게 똥 덩어리를 가격하는 장면이다. 전자에서 옥자의 똥은 물고기들의 밥이 되지만(똥 주위로 물고기들이 몰려든다), 후자에서 옥자의 똥은 박문도를 공격하고 결국 인간 사회의 오물이 된다. 이것 또한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순환의 논리를 따르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각 요인들이 대립과 반목의 관계를 지님을 암시한다.
    
옥자 외에 피 흘린 자가 있으니 바로 케이다. 케이의 손가락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이 두 번 있는데, 첫 번째로 미자가 ALF에 동조하겠다고 케이가 거짓 번역했을 때, 두 번째가 그 거짓말을 고백하기 직전 옥자의 강간 장면을 멤버들이 함께 보고 있을 때다. 이는 타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행동도 시간이 지나 결국 자신을 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묘사하는 자연에 대립하는 세계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따르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며 심지어 스스로도 해한다. 반면 자본주의 질서가 부재하는 모든 곳=자연에서는 모든 요소가 타자를 해치지 않으며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화해롭게 순환한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구도는 인위=자본주의=악/자연=선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결론지어도 만족스러운가.
    
인간 사회의 인물 구도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비자본주의적 질서를 살아가는 미자네 집에서 미자와 희봉은 대립적인 구도를 띤다. 희봉은 이미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여 거기서 이득을 취하려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옥자를 미란도에 팔아넘겼고, 옥자를 구하려는 미자를 막으려 한다. 미란도가 미자를 뉴욕에 초청했을 때도 희봉은 환호하며 미자를 배웅한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희봉은 친기업적 인물로 묘사된다. 미자가 반-미란도라는 면에서 둘은 갈등관계이다.
    
이를 바깥 사회에까지 확장하면, ALF와 미란도의 공존 또한 자연스러운 조화임을 유추할 수 있다. 쉽게 말해 ALF와 미란도는 공생관계라는 말이다. ALF는 자신들의 업적 달성을 위해 미란도라는 악의 축을 필요로 하고, 미란도는 ALF라는 환경단체의 클레임 덕분(?)에 더욱 교묘하고 효율적인 생산 기술과 경영학적 방법론을 개발한다. ALF는 끝내 미란도를 물리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

ALF의 성공으로 바뀐 거라곤 루시 미란도가 사임하고 낸시 미란도가 다시 경영을 맡는 것뿐이다. 그런데 두 인물을 틸다 스윈튼이 2역을 맡는다는데서, 사실상 둘은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변한 건 없다. 군비경쟁 시스템처럼, ALF와 미란도는 상호발전적인 관계를 형성하기에, 결국 둘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ALF의 앞면이 미란도이고, 미란도의 뒷모습이 ALF다.
    
두 레벨을 연결하면, 미자-ALF와 희봉-미란도는 각각 아군[친구]관계이다. 미자와 ALF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나 편의를 포기하고 결국 옥자를 구한다. 반면 희봉과 미란도는 자연(타자)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한다. 그러한 관계의 연장선에서 볼 때 미자와 희봉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미자와 희봉의 동거는 말하자면 ‘적과의 동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자는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유입되고 만다. 미자가 옥자를 구출하는 방식 때문이다. 미자의 입장에서는 옥자를 구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시선에서 그것은 미자가 금돼지를 주고 살아있는 돼지 옥자를 구입하는 상품 교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 미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행하는 자본-상품 거래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명 구호도 환경 보존도 상품 거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환경보호를 위해 유기농 제품을 구입하고, 방목식 토종닭을 사먹고, 유니세프와 초록우산에 기부를 해도 결국은 연말정산으로 다 기입될 소비활동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일이란 결국 다 소비활동으로 환원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죽은 돼지를 사먹을 때, 미자는 혼자 살아있는 옥자를 구입한다. 옥자와 같은 다른 수 천 마리 돼지들이 도살당할 때, 미자와 ALF는 그들을 구할 수도 미란도를 막을 수도 없다. 옥자만 구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물론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 관심과 노력이라도 기울여 보라는 것이 영화의 궁극적 제안이 아닐까. 이 철저한 자본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는 없더라도, 생명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라고.(옥자를 구출한 후 우리를 빠져나오면서 새끼 돼지 한 마리 몰래 데려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자 가족이 그러하듯 최소한 나의 가정에서라도 덜 자본적인 방식의 삶을 꾸려볼 수 있지 않냐고. 영화의 마지막, 미자와 희봉의 식사와 같은 삶을 우리가 실천할 수는 없더라도, 보면서 눈물 한 방울 정도는 흘릴 수 있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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