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 vs 지동설
이전 챕터에서 했던 "매수가를 잊으라"는 말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려 한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천동설의 세계에서 지동설의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말이다.
그에 반대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적 입장에 따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각자의 믿음과 세계가 있는 것이고, 각 입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지동설이 우월하고 천동설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건, 현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옳다고 따르는 권력 친화적인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다. 혹은 지적 엘리트주의와 계몽주의에 찌든 선민의식이라는 비판도 정당하다.
천동설이냐 지동설이냐 옳고 그름을 떠나 나도 위와 같은 비판적인 생각에는 완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천동설은 지동설 없이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지동설은 반드시 천동설을 알고 난 후에 떠올릴 수 있다. 천동설은 나만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해 유아론적 관점이다. 반면에 지동설은 나와 너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천동설은 점의 세계관이고 지동설은 선의 세계관이다. 그것이 바로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성장했다는 증거다.
이에 대해 좀 더 음미하기 위해 르네 데카르트를 소환하자. 많이들 오해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생각한다'의 의미가 왜곡되어서 이해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는 말을 논리적/이성적 사고로 이해한다. 그런데 논리적 사고란 실은 관습적 사고의 다른 말이다. 관습적 사고란 메뉴얼/절차에 따른 생각을 일컫는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는 볼프강 파울리에게 "당신은 계산만 할 줄 알고 생각은 할 줄 모르는군요"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저기서 말하는 '계산'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반면 보어가 말한 '생각'이 바로 데카르트가 의도한 '생각'과 맥락이 유사하다.
얼마 전에 본 [아일랜드]라는 어린이 동화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항에서 여행객들을 안내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인데, 주인공 로봇은 여행객들의 질문에 단순히 자신이 가진 정보값에 따라서만 답하는 것, 그러니까 메뉴얼대로만 답하는 것에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고 뭔가 새로우면서도 각 여행객에게 적합한 대답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메뉴얼에 따른 답변은 자신뿐 아니라 같은 모델인 다른 로봇들도 모두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로봇은 같은 모델의 다른 로봇들과 달리 특별해지고 싶어한다.
프랑스 태생인 데카르트가 계속 프랑스에만 살았다면 그의 역작 [방법서설]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그가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에 가서 살았기 때문이 그 책을 쓸 수 있었다. 프랑스에 살 때만 해도 데카르트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 가서야 그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네덜란드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것. 그런 벽들과 마주할 때마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통해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그저 프랑스의 관습에 따른 습관의 결과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깨우쳤다. 진정한 생각이란 시스템 내부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진짜 의미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라 프랑스식 사고를 하는 그는 프랑스에서는 온전히 '나'로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는 그저 프랑스라는 시스템의 입지로서만 기능했다. 네덜란드로 가서 프랑스라는 시스템을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에 부닥쳤을 때 그는 자신의 관습적 생각을 '의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데카르트는 온전한 '개인'으로 새로 태어났다.
보어가 파울리에게 했던 말의 의미도 그와 같다. 계산만 잘해서는 새로운 이론이나 세계관을 창출할 수 없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새로움이 생겨날 수 있다. 동화 [아일랜드]에서 주인공 로봇 또한 자신이 저장해 놓은 데이터와 연산 법칙을 벗어나야만 자신만의 고유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된다.
매수가를 잊으라는 말은, 주식시장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어린 생각을 벗어버리라는 얘기이다. 주가는 절대 나의 매수가를 기준으로 오르고 내리지 않는다. '나'라는 투자자는 그저 전체 거래대금과 비교하자면 정말 형편없는 투자금을 운영하는 개미에 불과하다. 내가 파니까 오른다거나, 내가 사니까 내리더라는 발상도 역시 유치하고 여린 마음이 만든 망상이다.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의 수는 천문학적이며, 그 금액 또한 마찬가지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과 중대한 정보력을 지닌 투자자들이 시장을 좌지우지 하고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나는 그저 그들이 펼쳐놓은 신기루 위에서 물 한 모금 적시는 목마른 토끼일 뿐이다. 그런 관점의 전환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이행,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Q. 내가 사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굴러간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사라지는 것과 같다. vs 이 세상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행인 a일 뿐이다. 그저 한 순간 살다가 사라질 미약한 존재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