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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04. 2017

결혼, 하나 안 하나 가는 곳은 하나

국민의 생은 처음이라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양호랑은 7년차 남친 심원석을 죽어라 갈구어서 드디어 프로포즈 반지를 받아낸다. 친구들 앞에서 엄청 자랑한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양호랑에게 정신 차리라고. 너가 인생의 목표라 생각하는 결혼은 진짜 니 꿈이 아니라 사회가 심어준 허상이라고. 왜 사회가 정해준 데스티네이션을 아무 고민도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냐고. 투벅거렸을 테다.


더구나 현재의 결혼 제도는 법에 의거해 국가의 틀을 더욱 공고히 하는 근대국가의 트릭이라고. 너가 결혼을 꿈꾸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결국 너도 모르게 국가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엄청 비난했을 것이다.


동안 나는 결혼을 부정하고 제도와 관습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삶이라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근대적인 삶의 자장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가문이라든가 가정이라는 관습에 억눌리고 않지 싶다는 나름의 저항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나, 개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개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전에 '개인'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머릿속에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씨앗처럼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개인이란 것도 근대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긴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까지도 인간은 '나'라는 자각없이 살아왔다. 그런 자각이 삶의 영역까지 침투한 건 불과 100-200년 전이다. 그렇다면 왜 그때 하필 개인이란 영역이 생긴 걸까. 그것은 근대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기존에 없었던 '국가'가 앞으로 사회의 중심으로 작용하려면 기존의 중심을 차지했던 '공동체'를 박살내야 한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것은 집안이나 가문, 마을 등이었다. 지금처럼 완벽한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문마다 지역마다 삶의 양식은 달랐다. 그 삶을 하나로 표준화하기 위해 국가는 각 지역에 자리잡은 공동체를 찢어놓아야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결혼의 법제화다. 국가가 존속하려면 생산력 국력이 필요하고 세금이 필요하다. 그것의 원천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생식뿐이다. 그런데 그 생식이 국가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출생과 사망을 알아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결혼을 국가가 관할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가문 사이의 전통과 관습이었던 결혼은 국가의 제도로 포섭된다.


또 다른 방법이 '개인'의 창조다. 예전에는 삶의 방향성을 공동체가 정해주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삶을 스스로 정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이다.


나는 여태 그 주문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것이 국가의 은밀한 주문인 줄도 모르고. 마치 삶의 뿌리가 온전히 내게서 출발하는 거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미디어가, 사회가 권하는 결혼을 고민없이 실행하는 건 타인에 굴복하는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결국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국가가 정해놓은 바운더리 바깥으로 넘어 살  없다. 로빈슨 크루소 또한 근대국가가 만든 환영이다. 마치 우리 모두는 섬처럼 떠다니는 독립적 삶을 각자 영위할 수 있다고 착각하도록 설계된.


그래서 나는 이제 호랑의 꿈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꿈이든 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나의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 스스로 창조한 꿈 따위는 없다. 아니, 스스로 창조한 꿈을 쫓아야 멋진 삶이라는 생각 자체도 편견이다. 왜 남의 길을 쫓는 삶이 2류여야 하는가.


이제 많은 동갑내기 친구들이 결혼했다. 그들의 선택과 나의 선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에, 나는 이제 그들의 삶을 응원한다. 물론 같이 놀 친구들이 점점 없어져 슬프지만. 우리가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 일말의 위안을 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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