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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14. 2017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효리네 민박]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19세기 일본의 우키요에는 정작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개무시당했다. 그 가치를 발견하고 높이 쳐준 것은 서양 화가와 지식인들이었다. 동시에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은 인상파 직전의 서양미술을 혐오했다. 그 혐오스런 작품을 외려 일본 지식인들은 극찬했다.


19세기 유럽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지금의 서울시민과 제주도민의 관계와 닮았다. 서울 사람은 서울에 놀 곳이 어딨냐며 제주에 내려가 자연 풍광에 감탄하는 반면, 제주도민은 대체 서울 사람들은 제주도 와서 뭐하고 노냐며 서울의 번화가를 탐닉한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사는 곳이 지루하고 따분하다며 투정 부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의 떡이 커보인다" 따위의 피상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서구가 일본의 그림을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과, 일본이 서구의 그림을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이 대칭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말하고자 한 바였다.


유럽은 일본의 그림을 자신의 서양미술사의 한 자리에 위치시켰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외 일본의 풍습과 제도, 도덕 등에는 무지하거나 무심했고, 유럽인에게 일본인은 여전히 열악한 야만인으로 비쳤다. 반대로 일본이 유럽의 미술을 보면서 취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미학뿐 아니라 유럽이라는 사회/문화의 전부였다. 일본은 유럽의 미술제도와 미술교육까지 그대로 가져왔고 서구의 시스템을 몽땅 자기 땅에 이식시켰다.


유럽은 그런 식으로 비유럽의 것을 미학적으로 베껴왔다. 아프리카의 토속품은 큐비즘과 추상미술을 낳았고 기타 아시아와 남미 또한 유럽의 미술사조에 가속도를 높였다.


그렇다면 유럽은 아프리카를, 아시아를, 문명적으로 발달한 곳이라 보았을까? 전혀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단지 예술적 관심에만 있었다.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이라는 것이 사이드의 속내다.


위에서 유럽과 일본(=비유럽)을 각각 서울과 제주로 바꿔 써도 문제없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에 가면 그 풍경에 감탄하지만 그게 끝이다. 그들은 시골에서의 삶을 원하지 않으며 시골사람과 도시인을 동급으로 보지 않는다.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를 보며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그들의 삶에 신기함을 느낄지언정 그들처럼 살고 싶다거나 그들이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 사람들이 아무리 제주도의 자연을 찬미해도 서울은 제주처럼 변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다. 반면에 제주 사람들은 서울을 예찬하며 정말 자신의 생활환경도 서울처럼 바꿔나간다. 어느새 제주시의 번화가는 웬만한 광역시보다 더 발전했다. 제주시내의 야경을 찍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그곳이 제주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효리네 민박]의 카메라는 철저하게 도시 관광객의 시점을 하고 있다. 카메라는 오름의 갈대, 바다의 파도, 각종 꽃과 풀, 하늘과 노을을 러닝 타임 내내 담아낸다. 거기에는 도시인이 시골과 자연을 바라보는 감탄의 눈빛이 담겨있다. 여행객들은 이효리처럼 제주에 내려와 전원주택이나 짓고 살고 싶다며 한 번씩 푸념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영혼없는 소리다. 그들은 실제 제주에 사는 이효리의 삶은커녕 제주도민으로서의 삶에 관심 없다.


[효리네 민박]에 실제 제주도민이 나오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나와 봤자 맛집/카페 주인이거나, 이효리 또는 아이유에 열광하는 팬으로서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제주도민의 삶을 그릴 수 없을 뿐더러 사실상 알고 싶지도 않다. 우리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오직 제주의 자연뿐이다.


우리가 자연보호을 외치는 목소리의 뒤에도 그와 같은 속내가 숨어있다. 내가 사는 곳은 번화하고 편리한 도시여야 하지만, 아주 가끔 쉬면서 힐링해야 할 자연은 어느 지역 한 켠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마음. 그런데 정작 그 자연 속에도 나와 같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야 어찌 되었건 내 삶에는 딱 요만큼의 자연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시인은 시골에 오직 미학적 관심만 가지는 반면, 시골사람은 도시에 대해 미학뿐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 가지며 도시를 닮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시골은 점점 도시로 변해가고 전국은 평준화된다. 도시인이 시골로 여행하는 것, 시청자가 [효리네 민박]을 시청하는 것, 제주가 서울처럼 변해가는 것은 서로 선순환하면서 각각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자본'이다. 영혼을 훔칠 듯한 감동적인 노을 뒤에는 자본이라는 태양이 세상을 고루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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