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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14. 2017

그것이 진실이냐 연기냐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메소드]에서 중요한 것은 두 남자가 연기하는 방식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악역을 맡은 배우를 실제로 만난 할머니가 소금을 뿌렸다는 류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게다. 나의 할머니도 예전에는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믿으셨다. 꼭 노인들이 아니어도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입해 현실과 혼동하는 사소한 사례를 보는 게 드물지는 않다.


[메소드]의 재하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다만 그가 시청자/관객이 아니라 연극배우라는 게 다르다. 그는 자신이 맡는 역할을 본인의 현실 세계에서도 진심으로 몰입해 경험한다. 그가 했던 지난 연극들에서도 그랬고, 그래서 실제 상대 여배우와도 사랑에 빠지고 헤어나오고를 반복했다. 이번에 빠질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게 다를 뿐.


반면 영우는 연극에 시큰둥하다. 원래 아이돌이었던 그는 연극을 통해 재기하려 하지만 이런 걸 해서 뭐하냐는 식이다. 그는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는 데만 열심이다. 팬들에게 사랑받는 데는 열성이지만 실제 연극 준비에는 불성실하다.


그런 영우가 연극에 대한 재하의 사랑과 카리스마에 조금씩 빠져든다. 마음먹고 연극에 열심히 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재하에 대한 사랑을 키운다. 연극에 대한 열정이 먼저인지 재하에 대한 사랑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둘은 맞물려 있다. 그 무렵 감독 원호는 영우에게 말한다. 재하가 그동안 쌓아온 비밀 연기노트가 있으니 보여달라 부탁하라고.


연극 준비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급속히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재하의 사랑은 과거에도 그랬듯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 끝은 연극 준비가 마무리되고 연극이 막을 올릴 때다. 재하의 사랑이 끝난 후 영우의 행동이 영화의 관건이다.


영우는 재하와 마찬가지로 연극 속 역할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혹은 사랑에 배반당한 실연자의 복수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둘이 혼재되어 있는 듯도 하다. 그는 재하의 집을 침입하고 부인 희원을 위협하고 살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부터는 관객도 (영화 속) 현실과 연극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혼란은 연극 중인 재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기 도중 영우의 도발과 돌발행동에 당황한다. 그의 의식은 연기와 실재를 오간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영우의 행동은 모두 완벽한 연기를 위한 페이크였음이 드러난다. 재하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관객도 아차 싶은 순간. 영우는 재하에게 말한다. 자신이 이겼다고. 당신은 결국 그 정도 수준의 배우밖에 안 되는 거였다고.


그때 영우의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극과 현실을 별개의 세계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 수준은 안타까운 것이라고 말이다. 영우도 재하에게 똑같은 맥락으로 말한다. 재하가 연극에 너무 몰입해 현실과 연극을 동일한 것으로 인지하는 반면, 영우 자신은 연극에 몰입해 현실에서의 삶과 일치시키는 순간에도 그 둘을 완전히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시각을 견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더욱 고차원적이라는 판단이다.


나는 재하와 영우를 남자 대 남자로 설정한 것은 일종의 맥거핀이라 생각한다. 만약 영우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설정했다면 이 영화는 익숙하고 식상한 로맨스가 됐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을 단순히 남남의 사랑으로 바꾼 것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이미 동성애 코드만으로 이목을 끄는 시절도 아니고,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을 의미망은 찾기 힘들다. 그러므로 본질은 동성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재하는 소속사 없는 개인 배우라는 것과 영우는 소속사가 있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것이 이 영화를 읽는 열쇠다. 재하는 돈이나 인기에는 무관심하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만 관심 있다. 영우는 전혀 반대다. 연극 자체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연극을 통해 자신이 다시 인기를 얻고 세상의 관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지인 중에 CGV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원래 예술/독립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상업/대형 영화를 싫어하며 특히나 멀티플렉스나 배급사 등이 영화판을 좀먹는다고 생각하며 비난했단다. 그런 본인이 이제는 자신이 욕하던 바로 그 멀티플렉스 회사에서 일한다는 게 몹시 창피하단다. 그래서 내가 위로라도 하려고, 그래도 대학로나 압구정점에는 예술관이 따로 있지 않냐니까, 그건 작은 영화판에까지 자본의 마수를 뻗쳐 시장의 파이를 키우려는 거라며 더욱 자책했다.


재하=전근대의 장인이라면 영우=자본가이다. 아마 이것이 둘 다 남성으로 설정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페미니즘에겐 미안하지만 전근대는 가부장제 사회였다). 자본가는 장인의 기술을 가져와 자본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다. 기술 자체에는 애정이 없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본을 최대한으로 뽑아낼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장인이 자본에 흡수되기 시작한 18세기에 활동하던 철학자가 칸트다. 그는 지성/도덕/미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으며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말한다. 거짓되고 악하지만 아름다울 수 있고, 악하고 추하지만 진실될 수도 있다. 물론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칸트가 지성과 도덕과 미를 완전히 독립된 영역으로 구별해서 볼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가 살던 시대가 있다. 그 시대에 자본의 힘이 막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성도 도덕도 미도 '이로움'이라는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 참/거짓, 선/악이라는 판단에 무심한 채 아름다움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이 내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세 가치를 모두 포섭하는 것은 '자본'이다. 근대미학의 배후에는 자본이 존재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재하는 아내 희원의 안전을 무시한 채 연극의 아름다움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미학은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우는 재하에 대한 사랑과 희원에 대한 질투, 자신의 연극을 모두 독립적으로 떨어뜨려 중립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우의 미학은 근대적이다.


하지만 영우가 자신의 실제 삶과 연극에서의 역할을 일치시켜놓고도 그 둘을 떨어져 관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우 개인의 역량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힘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도 예술적 혼도 자신의 삶도 결국 자본이라는 가치로 환산해서 계산한다. 그것이 영우가 영화의 초반에도, 마지막에도 모든 것에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재밌는 점은, 영화가 재하와 영우 그 어느 쪽의 연기가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놓고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 채 영화는 달아나 버린다. 그것은 마치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미학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이라는 세속적 욕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상 모든 영화감독의 스노비즘처럼 읽힌다. 어쨌거나 영화는 자본의 예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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