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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Feb 25. 2018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리틀 포레스트]는 휴식이 아닌 삶에 대한 영화



임용고시에 불합격한 혜원은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1주일에서 열흘 정도 머물다 올라갈 거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런데 웬걸. 1년이나 더 지내다가 그녀는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그리고 곧 다시 고향에 온다.

    

시험 이후 그녀는 왜 고향으로 왔을까? 일주일만 있겠다는 그녀를 더 붙잡은 힘은 무엇이었을까? 상식적인 답변으로는, 수험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서울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독거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불합격이 슬퍼서, 그런데 남자친구는 합격해서, 혹은 남자친구에게 실망해서,정도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면 [리틀 포레스트]는 그냥 말 그대로 잠깐 쉬었다 떠나는 쉼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녀는 고향에 1년 여 머물다 아예 다시 내려와 그곳에 정착한다.

    

고3 수능이 끝난 날, 혜원의 엄마는 가출했다. 집으로 오니 엄마가 없다. 혜원은 어느 정도 낌새는 알아챘지만 막상 엄마가 떠나고 나니 분하다. 화난 감정 그대로 혜원은 서울로 떠난다. 혜원의 서울 생활은 순조롭지 않았다. 또 시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집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을 가진 채 혜원은 고향집으로 내려온 것이다. 혜원의 고민의 시작은 실은 고3이 끝날 무렵부터였지만, 정작 그것을 풀어나가려고 한 것은 고향에 내려와서부터다.고향에 내려와 혜원은 끊임없이 엄마의 환영을 보며 엄마가 했던 생활을 반복한다. 엄마의 요리를 따라 만들고(약간 다른 버전으로), 엄마처럼 혼자 할 수 있는 자급자족적 농사를 조금씩 해나간다.

    

혜원은 문득 학창시절에 엄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엄마도 연애하고 싶으면 자식 눈치 보지 말고 해도 된다고. 그러자 엄마는, 너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때 혜원은 묻는다. “엄마는 아빠가 보고 싶어?”그 질문에 엄마는 다 먹은 토마토 꼭지를 멀리 던지고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던져도 싹이 트더라.”라고 답한다.

    

극중 혜원에게 그 말은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로 들리지만, 나에게는 사후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다 먹은 토마토 꼭지=남편과의 사별’에서 ‘싹이 튼다=새로운 삶이 시작한다’는 의미로. 또 하나는, 농사를 자식 농사로 비유한다면, 토마토를 아무렇게나 심어도 잘 자란다는 말은 곧 자식도 자유방임으로 키워도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의미로. 아마 엄마는 이때 이미 딸이 성인이 되면 가출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사람들은 4계절이라며 계절 순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부른다. 봄을 계절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싹이 트고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를 삶의 시작이라 여기곤 한다. 하지만 1년의 시작인 1월은 한겨울이고 1년의 끝인 12월 또한 겨울이다. 싹이 트려면 우선 씨를 심어야 한다. 씨를 심는 시기는 겨울이다. 겨울이 없으면 삶도 없다. 마치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듯 말이다.(먹는다는 것은 먹히는 대상의 죽음을 뜻한다. 영화에서 끊임없이 요리 장면이 나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도 겨울이다. 겨울은 씨를 품고 있고, 혜원에게 그 씨앗은 그가 그동안 품어온 고민의 씨다.그녀는 돌아온 고향에 그 씨앗을 심었지만, 씨앗만 심고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뿌린 씨앗을 1년 동안 소중히 키우고 겨울에 서울로 돌아간다. 그녀가 뿌리내린 씨앗은 어떻게 되었나.

    

혜원은 고향에서 사는 1년 동안 엄마가 떠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엄마를 줄곧 미워하는 척했지만 실은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엄마와 화해한다. 서울로 돌아가버린 줄 알았던 혜원은 이내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시골 생활을 이어간.


봄이 올 듯한 어느 날, 여전히 혼자라고 생각한 집의 현관문(?)이 열려 있다.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에 대한 의문의 씨는 1년 후 엄마를 다시 되돌려놓은 것이다. 그녀는 1년의 노력 끝에 자신의 답을 찾았다. 사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어도 그녀는 고향에서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귀향은 덤이다.

    

과거에 고모가 엄마를 구박하는 장면이 있다. 토마토 밭에 잡초가 왜 이렇게 많냐고. 무엇이 토마토고 무엇이 잡초인지 분간되지 않는다며, 앉아만 있지 말고 당장 뽑으라고 말이다. 그래도 엄마는 웃으며 잡초를 뽑을 생각이 없다. 이들이 가꾸는 것은 밭이 아니라 숲이기 때문이다. 밭이라면 토마토만 살겠지만 숲에는 각종 생명체가 저마다 어울려 산다. 그들의 삶은 리틀 팜이 아니라 리틀 포레스트이다. 서로 떨어져 제각각 독립적으로 사는 듯해도 그들의 내면은 서로 이어져 있다. 나무가 그렇지 않은가. 제각기 거리를 둔 듯하지만 나무는 서로가 서로에 기대고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숲은 휴식을 위한 숲이 아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작은 숲이다. 인간의 삶도 결국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떠난 자는 돌아오고, 돌아온 자는 다시 떠나기 마련이다. 계절이 겨울에서 시작해 겨울로 끝나듯. 씨앗이 씨앗을 낳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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