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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pr 17. 2018

윤리에서 배려로

[몬태나]로 읽는 윤리학



[몬태나]는 시작부터 불편한 영화였다. 서구, 특히 미국의 역사에 반감이 큰 내게 [몬태나]는 민감한 시대의 민감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 조셉 블로커의 태도는 나의 선입견을 더욱 강화했다. 적어도 영화의 초반, 추장 가족을 데리고 몬태나로 가라는 명령에 조셉 블로커가 분노하며 불복종하려는 태도는 도저히 수긍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따지고 보면 미군은 가해자고 홍인은 피해자다. 가해자 주제에 어찌 감히?


이러한 나의 반감은 로잘리 퀘이드의 등장으로 사그라들었다. 그제서야 백인 피해자의 아픔이 이해됐다. 나는 사람들을 덩어리로 뭉쳐서 생각했던 것이다. 집단주의. 개인의 도덕성과 입지를 그 사람이 속한 국가 혹은 사회를 통해 추론하는 관점이다. 나는 당시 미국인은 결국 다 나쁜 거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잘리 퀘이드를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홍인에게서 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분노가 1차적으로는 가족을 헤친 홍인들에게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 내가 같은 처지여도 그랬을 테니까. 무릇 마음은 역지사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셉 블로커의 아픔도 다르지 않겠구나 생각 들었다. 그 또한 전투에서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 무리들에게 수많은 친구를 잃었다. 그동안 친구들과 부하들을 숱하게 죽인 옐로우 호크 추장을, 이제는 그가 늙고 병들었다고 감옥에서 풀어주고 다시 고향에 무사히 보내줘야 한다니. 게다가 그것이 상부의 명령이라니. 이 나라는 대체 누구의 편인가. 계속 국가의 뜻을 따라야 하는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을 거다.


결국 그는 국가의 명령을 따른다. 처음에는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처벌받는 것까지 감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퇴직 후 연금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대령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군인이 조셉 블로커와 같은 생각은 아니다. 흑인 병사와 훈련병, 토미 토마스는 한치의 의심없이 국가와 조셉의 편인 반면, 친구인 토마스 메츠는 국가에 회의적이다. 홍인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처벌 받으러 끌려가는 찰스 윌스는 아예 반국가적이다. 그는, 한때 홍인에 적대적이던 국가가 왜 이제 와서 홍인과 친화를 외치냐며 불만이다.


나는 [몬태나]의 인물을 3가지 도덕의 층위로 보려 한다. 양심 윤리 배려다. 양심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을, 윤리는 국가 차원, 배려는 인류 차원의 도덕으로 정의하겠다. 찰스 윌스는 철저하게 양심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사람들을 판단한다. 한때는 그의 양심과 국가의 윤리가 일치했었다. 그도 국가도 홍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지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국가는 홍인을 악도 적도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려 한다. 이제 찰스의 양심과 국가의 윤리는 어긋난다.


찰스는 자신이 옳고 국가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양심 안에서 그는 영웅이다. 그리고 한때 국가의 윤리에 따라 홍인을 학살하던 조셉 블로커 또한 영웅이었다. 허나 지금의 조셉 블로커는 국가의 개일 뿐이다. 적어도 찰스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국가가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리는 조셉 블로커는 과연 정의로운가. 오히려 처벌 받아야 하는 쪽은 조셉이 아닌가, 라고 찰스는 말한다.


조셉의 친구=토머스 메츠는 어떤가. 그는 국가에 불만이다. 한때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해 수많은 홍인을 죽인 자신과 친구들은, 그때는 영웅처럼 대접받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위세가 안정된 지금은 찬밥 신세다. 국가의 명령에 충실한 자신들에게 남은 건 둘 중 하나다. 죽음 또는 외로움. 그는 회의한다. 자신의 행위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냐고.


토머스의 답은 이렇다. 누굴 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미군과 홍인들을 위한 건 아니었다고.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은 정의롭지 못했고 따라서 그에 따른 대가를 스스로 치러야 한다고. 그는 옐로우 호크 추장에게 사죄한다. 그러고 홍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해놓고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찰스를 처단하고 자신 또한 목숨을 끊는다. 찰스와 토마스는 둘 다 국가의 윤리를 불신했지만 그들이 택한 도덕은 정반대다. 찰스는 개인의 양심을, 토마스는 인류의 배려를 택했다. 그리고 둘 다 죽었다.


영화에서 살아남은 자를 살펴보자. 최후의 생존자는 단 3명이다. 조셉 블로커, 로잘리 퀘이드, 블랙 호크의 딸. 우선 조셉 블로커는 처음에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국가의 마지막 명령(=옐로우 호크 가족을 몬태나로 데려가라)을 어기려 하지만 결국 완수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못한 선택이다. 노후에 연금이라도 받기 위한. 그래서 초반에 그는 줄곧 옐로우 호크에게 적대적이다. 심지어 그와 1:1 대결을 벌이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최초의 습격 이후 그의 태도는 조금씩 변한다. 자신이 그렇듯 옐로우 호크에게도 개인적인 원한이 있고 홍인들의 세계에서도 다양한 역학 관계가 있다는 것. 어찌 됐건 지금은 진심으로 얠로우 호크가 자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몬태나에 거의 도착해서 조셉은 추장에게 말한다. 당신과의 전쟁에서 친구들을 모두 잃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원한의 말이 아니라 화해의 말이다. 내가 친구를 잃었듯 당신 또한 마찬가지 아니냐고. 우린 이제 적이 아니라 같은 경험 같은 아픔을 지닌 동지라고 말이다. 몬태나에 도착하니 이미 추장은 숨이 멎어 있다. 그를 그 땅에 묻자 그곳의 주인이라 칭하는 보안관이 나타나 조셉 무리를 쫓으려 할 때 조셉과 로잘리의 행동은 영화에서 아주 의미 깊다.


몬태나의 보안관이 홍인과, 그들을 편드는 미군마저 쫓아내려는 건 온전히 본인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개인적 양심의 층위에 해당한다. 그에 조셉은 이것이 대통령령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보안관은 국가의 명령도 무시하고 개인의 도덕을 내세운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에게 남은 답은 처벌이다. 국가를 대신하여 조셉은 그들을 처형한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명목상 조셉은 국가의 대리인 같지만 이제 그는 본인의 자의로 그들을 해치운다. 대통령 때문도 국가 때문도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옳다고 여겨서다. 그동안 조셉이 국가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따랐다면, 지금은 자신의 수행에 진심을 담았다. 국가의 윤리를 개인의 양심과 일치시킨 것이다.


로잘리의 경우도 큰 틀은 조셉과 유사하다. 초반에 그녀는 가족을 잃은 원한에 상심하여 옐로우 호크 가족을 불신하고 증오한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홍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된 중요한 계기로, 그녀는 개인적인 복수를 간접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이다. 죽은 도적 무리 중 한 명에게 반복해서 총을 쏘는 장면이다. 물론 그런다고 죽은 자식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가슴의 한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 행위는 그녀를 분노와 상심에서 해방시켰다.


또 한 가지 조셉과의 차이는, 로잘리의 세계에 국가는 직접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가 개인의 원한을 극복하고 홍인을 이해한 인식은 인류의 배려라는 층위에 더 가깝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면서 조셉과 합심하여 몬태나 보안관 패거리를 무찌르고, 가족이 다 죽고 홀로 남은 블랙 호크의 딸을 혈혈단신으로 받아들이고 키우려는 의지는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보편적 타자에 대한 이해'라는 맥락으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조셉이 국가의 윤리를 개인의 양신으로 받아들였다면, 로잘리는 인류의 배려를 개인의 양심과 일치시킨 셈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할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조셉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기차에 오른다. 그는 로잘리와 홍인의 딸을 함께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것은 남녀의 결합이 아니다. 개인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들은 명령 수행 중 단 한 번도 성적 결합을 하지 않았으며 로맨스적인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셉과 로잘리의 만남은 국가와 인류의 결합으로 읽힌다. 국가의 윤리가 이제는 인류의 배려 차원으로 넓어진다는 뜻이다. 홍인을 살육하고 배제하던 미국은 이제 그곳이 그들의 땅임을, 그들 또한 독립적인 인간임을 이해하고 선언한다.


국가의 윤리가 백인의 사적 이익을 옹호하던 도덕을 반성하고 집단의 윤리를 넘어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배려의 단계까지 넓어지는 과정을 [몬태나]는 보여준다. 우리 세계는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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